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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李海仁)의 일련의 시집 (詩集) - 시(詩)와 신(神)
1988년 시문학 3월호 / 안수환

네 원수를 사랑하라

 

이 聖句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라는 말이다. 감지자에게는 이 선언이 기독교 논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갈등 구조의 역설Paradox로 들린다. 그 갈등 구조란 두 논조가 서로 팽팽히 대립됨으로써 생기는 긴장을 두고 하는 말인데, 기독교는 바로 이 역설을 내세워 항간의 사리와는 디르게 종교적 진리를 선포하고 있으며, 공공연히 인간과 신의 관계, 인간과 인간, 그리고 물질과의 관계까지 마저 해명하려고 한다. '십계명' 혹은 '주기도문'에서 밝힌 가르침은 한결같이 하늘(신)과 땅(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요청한 것인데, 이것은 그 관계가 잘못된 처지-인간은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서로 소외되었으며 땅은 저주에 떨어져서 하염없이 땀을 흘리지 않고는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신과 인간이 다시 약정한 계약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바대로 인류는 아직 타락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여기저기 사탄에게 절하는 사람과 제도와 법리가 있어 그 허다한 조직이 한사코 천지인의 화합을 끊어 놓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세력에 인간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삶을 방기하며 죽을 때까지 한 개인의 생명을 악의 면에 헌납하고 또는 사회 양식의 보편적 규범에 동조하면서 꼬박꼬박 세금이나 납부하면 되는 일이니, 보아라, 인간됨의 숙명을 속절없이 슬퍼하며 만방에 고통이 깔려 있다고 탄식하게 된다면 그나마 이 세상의 명맥은 끊어지고 만다.

 

그러나, 만사는 그렇게 형통하는 법 없다. 더우기 잃어버린 신을 회복하고, 이웃과 더불어 춤을 추며, 물질에 대해 탐내지 않고 살 수 있는 올바른 관계로 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물론 예수처럼 그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기만 하면 된다. 뿌리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예수는 신의 능력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깨뜨리는 유혹을 거부한 후, 세번째로 사탄과의 화해를 터놓는 시점에 봉착했다.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경로들 고되게 수행하는 것보다 쉽게 가는 길을 택하는 폭이 훨씬 현명하다는 제안이었다. 예수는 더욱 완강히 거부했다. 즉, 천신만고 끝에 우리가 얻은 문화는, 그것이 기독교의 창조적인 뜻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필경 그러한 가치임에는 틀림없다. 하물며 인간을 끝까지 인간으로 지키려고 하는 기독교문학의 예술적인 노력에 있어서랴. 시인의 통찰은 결국 저 자연과 인간과 신에 대하여 새로운 꿈을 꾸고.그 속에서 본질적인 힘을 건져 올려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선명히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데도 아직 기독교 시인이 종교의 서술성에만 매달려 그 개념과 형식에 도취해 있다면, 창조의 기쁨은 커녕 한낮에 벌레 한 마리가 기어다니는 것도 벌하지 못할 것이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物神과 감상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원칙적으로 시인은 시간을 오염시키는 망각과 공간을 개폐하는 편의에 대하여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는 모든 생멸의 문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관념과 싸움박질하면서 세상을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하며. 더우기 기독교 시인이라고 한다면 신에 대한 심미적aesthetic 감응의 개방성, 그 세계인식의 주제를 명확히 포착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모두 천ㆍ지ㆍ인 사이에 끝없이 개방된 관계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 시는 대부분 실패하고 있는 실정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구나 편협한 종교시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따져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독선으로 사람을 몰고 가는지. 저러한 종교시의 허상을 신빙함으로 말미암아 독자ㆍ시인은 또 얼마나 깊은 감상의 허위에 젖게 되는 지, 그 실상을 규명하는 가운데 한국 기독교 시의 성패를 타진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내 만용에 꼭 李海仁의 시가 대응되는 것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시인이야말로 그가 시인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기독교적 구원의 경륜을 지금껏 엄숙하게 수행하고 있는 까닭이다.

 

예수와 마리아가 결합하듯
나도 그들과 하나되는 은총이여
가까운 이웃과 함께
모르는 이웃과도 하나되고
산 이들과 함께
죽은 이도 하나되는 신비여
-'묵주의 기도' 일부

 

위 시에서 시인은, 성서가 일러주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폭적으로 수락한다. 물론 기독교 문학에 있어서 예수의 자리란 본질을 의미한다. 그러찮아도, 예수에게 투영된 神性이란 그분 혼자 신의 자리를 차지한 본성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역사 속으로 들어와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며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시에 나타난 예수 형상은 거기에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존재하는 신이라고 할 때 신은 진정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항상 수행되는 본질로서의 모습으로 현현하며, 진주처럼 진흙탕에서 캐내는, 이른바 구원의 대상으로 규명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섣불리 예수 형상을 詩化할 때 시인이 저지르기 쉬운 심각한 잘못은 신을 私有化하는 경항인데, 이러한 착각을 통해서 유감스럽게도 신은 여지없이 物化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좀더 근원적인 이유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따질 것도 없이 신을 사유화하는 전통은 교회의 권위 체제로부터 나온 것이며, 특별히 시인이 기독교인일 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러한 생각에 젖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시를 창작하는 시인의 가장 큰 불행은 자기도 모르게 신을 대상화하는 특권 의식에 빠진다는 점이다.

 

대상화된 신은 벌써 시대와 역사 속으로 들어와 활동하는 수행능력을 잃고 다만 한 시인의 가슴에나 접맥되어 고결한 전도행위, 언어의식을 통해 독자의 가슴에다 간신히 물화된 신을 떠안길 따름이다. 예수는 그런 신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애당초 예수는 개인에게 점유되는 품격으로부터 인간이면 누구나 평등한 자리인 무리들 속으로 들어왔다. 신이라는 자신의 특권마저 버리고 노예들 편으로 내려온 그분은 인간의 자기 소외를 파괴하는 힘으로써만 어느 개인이든 거두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기 소외에 빠진 인간을 거둔다고 볼 때 예수의 先在性은 시대와 역사적인 시각으로 바라다 보아야 마땅하다. 즉, 예수는 묵시적apocalyptic 표상의 겉옷 따위는 처음부터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물화시킨 자의 神性에 대한 확인은, 비약해서 말한다면 신의 不在性을 철저하게 경험한 다음에야 드디어 참다운 신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의 外化에 충실한 기독교시가 거꾸로 신의 슬하를 떠난, 좀더 적극적으로 말해서 신을 방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를 살펴 보았다.

 

신에 대한 주관화와 객관화에는 다같이 그분의 초월성을 소멸시키는 함정이 있다. 초월성, 이 초월성은 무엇인가? 이것은 신이 인간에 대한 同化와 다름아닌 의식이다, 신이 더 이상 사유재산으로 남지 않는 경우에라야 시인은, 한 사람이 만민을 위해서 자기자신을 던져 자발적으로 변화하는 그 상징체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초월이 이러한 해석을 공여하는 인식 주체가 아니라면, 우리는무엇으로 시적 자유권에 참여할 수 있을까?

 

이 점에서 바로, 언어를 통하여 신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신은 언어의 고정된 의미와 부합되는 지시대상signifie이 아님에도 불구하고-통념에 굴복해 버린 시인의 독선을 만나게 된다. 만일 독자의 입장에서 시인과는 다르게 이 통념의 자리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 나기만 한다면, 저와 같은 의미대상의 신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엉뚱한 신비까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잘 보이는 당신 앞에
나는 허무를 쪼아먹는
벙어리 새입니다
--'주일에 나는' 일부

그대 등에 업히어
흰 江을 건널 땐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 지

그 나라의 향연에선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밤마다 설레이며 생각합니다.

-'그대 차가운 손을' 일부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민들레의 領土' 일부

千里 밖에 계셔도
가까운 당신

당신으로 말미암아
내가
꽃이 피는 봄
- '千里香' 일부

흰 옷 입은
천사의 나팔소리

나는 오늘도
부활하는 꽃이에요
- '백합의 말' 일부

다시 세례받고
햇빛 속에 널리고 싶은
나의 혼을
꼭 짜서 헹구어 넌다
- '빨래' 일부

 

위 시행들은 신과의 해후에서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고생이 결여된 듯이 보인다. 신에 관한 탐색이 불행하게도 신에 대한 해석이 될 때는 그에 수응하는 모든 언술들이 허구로 물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시인은 새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허구는 종교적인 구도생활에 있어서-그것이 시창작의 치열한 창조행위로 바뀔 때는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가장 먼저 뛰어 넘어야 할 벽이 된다. 종교시의 미학은 허구가 아닌 감동의 힘이며, 그 힘은 도리어 비탄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이 비탄이란 현실과의 접촉을 통하여 얻게 되는 리얼리티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리얼리티와의 대결은 마땅히 시인에게 허구 적ㆍ신비적 감성으로써의 언어놀이를 포기하는 대신 의미의 원천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의미에 포진한 실체는 앞서 말한 시인의 독선이 불러오는 해석으로써의 도표를 치우고,그렇기는 커녕 시인이 성취한 언어체계로도 모두 건질 수 없는 배경까지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 때 독자는 임의로 시인의 독단을 취할 수도 있고, 또는 그 의미기호sipifiant의 설득을 자유롭게 부정하는 즐거움을 간직할 수도 있다.

 

이 분방한 선택은 특별히 종교시가 갖는 표면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려, 말하자면 왜곡된 초월성의 법통을 벌거벗기면서 독자로 하여금 신선한 충격을 받도록 도와준다. 한편 종교적 圖像·관습 안에 시인이 여전히 안주해버린다면, 독자는 그 초월성의 과잉에 대하여 저항하게 되거나 터무니 없게도초월적 규범의 화려한 문체에 탐닉된 나머지 그쪽으로 경사진 목소리의 지루함마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야말로 독자는 신의 부재를 드러내는 미혹의 길로 접어든 셈이다.. 그 미혹의 길이 용의주도하게 독자를 사로잡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독자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세계가 부조리하고 모순된 조건들로 채워져 있다는 인식에서, 대개 시인이 보여 주는 그 확신에 찬 神像을 너그럽게 수긍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따지고보면, 이러한 전제조건 하에서 신에 관한 명상이 명료해지면 질수록 그에 동원된 媒材들은 정연한 질서를 이루면서 시인의 정신을 간섭하려고 한다. 일단 그 질서가 마땅한 신관으로 승화될 때는 시적 긴장마서 사그라져 그 신관에 복속되고 만다. 뒤에 남은 것은 구문 뿐이다. 단순한 종교적 차원을 넘은 절대적 신앙이 단박에 시인의 의식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한번도 자기 마음으로 자유로운 말을 할 수 없다.

 

당신 위해 준비된 나에게
말은 이미
소용이 없습니다.
--'촛불' 일부

오늘도 샅샅이 나를 살피시는
눈이 크신 주님
--'보게 하소서' 일부

진정 소리내어 외칠 것은
당신의 크신 은혜뿐

새로이 고여 오는
감사의 마음 받쳐 든 우리
--'은혜의 빛 둘레에서' 일부

 

이곳에는 다만 신에 대한 不可知論Agnosticism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의식의 초점이 흐려진 상태와도 같아서, 신을 찾는 이 의식의 극대화 속에는 신앙과 불신과의 相違性이 무시된 채 오직 개인의 심리적 공간만 떠있을 뿐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아무런 주관도 없다. 이 주관으로서의 시적 관점이 확보되지 않은 마당에서는 신을 바라본다는 것이 곧바로 접신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신앙의 대인적ㆍ사회적 기능은 애당초 제한되어 버린다. 이것은 무한한 공간이 유한한 충동을 삼켜버린 예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사회성이 허용되지않는 형편에서, 그나마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 비논리가 또 무엇으로 집중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배고픈 내 영혼이 불씨를 당겨 오는
밤은 아무도 돌로 치지 않는
그리스도의 심장
--'뜨개질' 일부

주신 말씀
하얗게 풀어 내며
당신 아닌 모든 것
버리고 싶어

당신과 함께 죽어서
날개를 달았어요
--'민들레' 일부

신선한 뜨락에 피워 올린
한 송이 소망 끝에
내 안에서 종을 치는
하나의 큰 이름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나팔꽃' 일부

 

이 정태성! 이 시대의 고통이 끝나게 되면 먼 장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벌써 이 사회의 한 복판에서 용출하는- 化肉ㆍ십자가ㆍ부활 등의 연계 체계로 살아 움직이는-신앙의 역동적인 수행이 망실된 채 허망하게도 신을 영입하려고만 하는 판단이 들어와 있다. 이래서 시인이 지금 살고 있는 지점이 곧 상상과 상징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이른바 기호체계에 의하여 엄격히 통제되는 공간임이 드러난다. 이 상징적인 것이란 주관과 객관 사이에 아무런 명백한 구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즉 주관과 객관을 구별하는 중심자아가 부재하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이는 앞서 얘기한 바, 신을 사유화한 입장에서 절대신앙을 추구하고 있는 시인의 편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신앙의 표상으로 떠오른 객관적 타자인 신과 그 세계의 권능을 인간의 신심에 內合시키고자 하는 관점과도 또 다른 것이다.

 

신이 대상의 세계가 되어 개인의 심중으로 들어서는 이 물화reification의 경향은 오로지 개인적인 신앙의 순수한 함축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무신론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이라는 대상이 곧 물질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대상은 의식의 자율성을 통제하며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심리 속에 깔린 다양한 내적 모순과 갈등을, 앞서 이야기한 물화된 신 인식으로 단번에 소멸시키려고하기 때문에 시인의 예술 행위도 결국은 특정한 이데울로기의 표현으로 바뀌어 버린다. 신 인식의 이와 같은 관념적ㆍ심미적인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좀더 자유로운 조건이 유연하게 음미되어야 한다.

 

작품 속에 들어간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언술이 삶의 리얼리티를 마치 통합적으로 설명하고 계시하려는 것처럼 착각하는 단층을 벗겨내고, 산 체험에 대한 시인의 정신적인 체계들-그것이 삶의 유동성으로 반영되는 것이지만一을 상상적인 의식의 과정을 통해서 일단 유보해 두는, 서술자로서의 생략효과를 채택하는 방법이다. 특별히 종교시에 있어서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그 점을 말해서는 안될’ 부분이 있다. 이 말하지 않는 생략의 전략이 인간의 삶에 대한 신의 필연과 다른 인간관계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가치질서 체계를 옹호하는 구조로 작용한다.

 

종교적 경험에 대하여 섣불리 외형적인 假現을 부여하게 되면, 시는 리얼리티의 중력을 떠나 즉각적으로 이데올로기의 결점과 모순으로 얼룩져 관념의 굳은 껍질을 붙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의 이데올로기 현상에 문학이 동조하는 꼴이 된다. 종교시의 운명은 그러므로 능청에 있다. 이 능청은 일단은 지시대상을 갖지 않은 은유 속에서 이루어진다. 은유는 의미에 갇히는 언술을 뿌리친다. 신은 의미가 아니고 의미화signification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신을 만나고 있는 시인의 의식-의식하고있는 과정이라고 봄이 더 적합하지만-이 협소하여 독선ㆍ독단에 빠져 있을 때는 벌써 저와 같은 은유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언어의 권능이 나타나 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러한 신은 번번이 시적인 우상에 불과한 것이거나,神性을 표절하는 기호일 따름이다. 이 기호에 부합되는 신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시인은 다음과 같은 불안정한 기도의 단위, 즉 너무도 당연한 신과의 疏隔으로 밀려난 처지에 놓이게 된다.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말을 위한 기도' 일부

 

이 소격이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자리에는 인간의 종교성, 신을 향한 의미의 냉혹한 유보만 확대될 뿐, 신에 의하여 인간의 지평이 고양되는 이른바 은총의 영원회귀 과정은 누락된다. 왜냐하면 인간을억압하는 神性이란, 이미 -데카르트Descartes(1596-1650)가 지적했듯이 언어가 증거하는 선동에 의하여 당연하게도 종교적 독선이 몰고오는 허상ㆍ가식을 인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李海仁의 시가 많은 독자에게 읽히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많은 독자라고는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아직 뚜렷한 주관이 확립되기 전의 젊은 세대들이라고 봄이 옳다. 이 시기는 대개 자신이 만난 세계를 환유적인 언어기호로 대체시키거나, 심지어는 현존하는 실체를 꿈의 연장으로 간주하는 나머지 언어의 힘마저 감상적인 유희로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익숙한 관념체계, 사고의 근거란 미상불 실제로부터 방출되는 예감의 유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미문에 대한 애착이다.

 

당신의 숲속에서 나는
도토리만한 기쁨을 주워 먹으며
마음도 영글어 가는
한 마리의 신나는 다람쥐

때로는 동그란 기도의 알을 낳아
오래 오래 가슴에 품어 두는
한 마리의 다정한 산새

당신의 숲속에서 나는
思惟의 올을 풀어 내며
하늘 보이는 집을 짓는
한 마리의 고독한 거미

그리고 때로는
가장 조그만 은총의 조각들도
놓치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한 마리의 감사한 개미
--'당신의 숲속에서 1' 전문

 

이 미문에 대한 집착은, 한 눈에 보아도 시인을 사로잡고 있는 엄밀한 느낌, 즉 이 지상적인 시간 위에 영원한 현존이란 아무데도 없다는 낭만주의적 발상에 젖어 있는 증거를 보인다. 결국 이러한 발상은 자연세계로부터의 초월적인 인지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결여로 인한 공간 부재의 허망을 낳는다. 이 허망을 막지 못하면, 시인은 따라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천상의 풍정에 대해서도 시시때때로 다른 감응을 나타내며 이미 가슴에 찍어 놓은 그 비유들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신은 한낱 이상한 나라의 주인('봄 아침')으로, 또는 성가신 당신('不忘의 날에')으로도 물러나 앉게 된다.

 

자연을 미화하는 의식 속에는 범신론Pantheism이 그러한 것처럼, 필연적으로 모든 사물을 신 인식으로 추론해 읽는 나쁜 버릇이 끼어든다. 혹은 은유적인 유사성에 매몰된 허구가 흐려질 때, 그동안 유보 되었던 진실이 일숨간 표면으로 돌출함에 따라서 시인은 별 수없이 사실과 비유를 더욱 불완전하게 병치시키는 일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이 사실은 李海仁 문학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다.

 

삶에 대하여 언급하는 시인의 화려한 문체가 시와 같은 환상적인 힘과 초논리의 미묘한 양상으로 확대된다면, ‘누구나 신과 함께 있다’는 인상-불트만(Bultmann l884-1976)의 용어를 빌리자면 ·'前이해’와 같은 침묵-에 동참할 때라야만 오로지 시적인 공명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역사적인 차원에 관심을 두고 읽는다면 역시 저러한 침묵은 헛된 것이며, 신앙의 탐미적 조종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로부터 일탈한 유미주의는 그 탐색의 일관된 방향에서, 혹은 일상적인 사건과 충돌하는 神性의 섬세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실패로 돌아간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불신시대에 살아가고 있다.이러한 시대일수록 시인은 개인의 심중에 와 닿는 불연속적인 신 인식의 문제에 천착하는 일보다도 역사에 작용하는 근원적인 힘의 변화에 관심을 돌이키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역사상 Gesellschaft의 예수-개인의 이름으로 폄하될 때는 그분을 긍정하는 신앙심이란 것도 별 수 없이 역사와 단절된 범위를 지칭하는 일에 불과하므로-가 시대를 좇아 일반화되는, 역사적 Gemeinschaft인 인물로 설정되는 일련의 구조적인 법칙을 거느려야 한다. 그 예수의 위상에 대하여 기독교 시인이라면 누구나 각별한 명상을 쏟아야 한다.

 

이러한 명상을 통하여 시인이 얻을 수 있는 관점은 개인에게 반복되는 신관의 불합리한 비유를 덜 뿐만 아니라, 예수를 단순한 시상의 소재로 오염시키던 유희를 깨끗이 청산하고 정말로 역사속에서 활동하는 신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길을 확고히 터놓는다. 가령, 기독교적인 구원만 하더라도 예수의 贖罪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것은 脫세계적인 의미부여의 관념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날 교회는 끊임없이 고백해 오고 있다. 그 관념론과 동반하는 어떤 언술이든 언제나 그 노력이 가짜라는 점은 쉽게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 기독론의 문제는 앞에서 누차 강조한 것처럼, 실로 기독교문학에 있어서는 모든 의미의 기원이며 또한 창작인의 정신구조를 결정하는 진정한 지표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것은 시인의 의식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남는다기보다 먼저 그 작품의 근원적인 요체를 이해하는 성향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여기서 문학과 신학이 갈라진다.

 

이 점에서 신학보다도 훨씬 유동적인 문학은, 개인의 내적 경험을 통하여 충전되는 작품이 필연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과 더욱 긴밀히 상관하고 있는 점을 자랑한다. 이 기준에서는 어떤 성역의 언어이든 그것이 비록 비문학적인 언어라고 할지라도 작품은 기탄없이 그 문맥들을 수렴한다는 점에서 더욱 자유로운 입장을 구가한다고 보겠다. 도리어 그것이 기독교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신과의 대화를 경험하면서 체득한 경건주의, 혹은 뜨거운 신앙심마저 포기한 상황 아래 여지없이 굴러 떨어진 인간됨의 처절한 훼손, 거꾸로 그 인간됨의 아름다움만을 지키려는 고집이 이 문학 가운데 용납됨으로써 종교적 구원의 심원한 세계가 가일층 극명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물론 기독교적인 구원의 필요성은, 그러나 인간의 활달한 희망, 합리적인 사고, 세속에 대한 신뢰와는 상관없이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모순ㆍ 한계를 초월하려는 이른바 삶의 총체성을 바꾸려는 생각이므로 인간과 신의 관계를 엄격히 구분하고 그 속에서 이 땅과 하늘의 역동적인 만남을 기획하고자 하는 통로는 인정되어 마땅하다. 다만,인간의 문제를 곧바로 신의 존재와 연계시킨 이 문학 특유의 종교적인 성찰이 섣불리 인간의 삶을 구도정신의 허울로 못박게 된다면, 그 경외로운 초월이라는 것도 별 수 없는 거룩한 오만의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바로 기독교문학의 이원적인 갈등을 드러내 주는 언표라기 보다는 의당히 역사와 靈性의 집합구조로 살아남을 그 문학의 주안점을 다시 한 번 진부하게 지적한 발언일 따름이다.

 

환원하면, 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 바깥에 꽂혀 있는 본질로서의 질서와 완벽한 화합을 이루겠다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방자하게 신의 자리를 찬탈하게 되고 만다는 인간됨의 고통을 솔직히 시인하는 측면과, 그와 동시에 오로지 신의 代贖的인 은공을 받아 들임으로써 이 땅위에 신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 기독교적 구원관을 다같이, 그렇지만 함께 연결할 수 밖에 없음에서 지금껏 대속적인 상반성의 극단으로 나타난 오해는 걷힐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李海仁의 시 속에서 일상에 파고 들어온 예수의 모습을 잠깐 살펴 보기로 하자.


누군가 내 안에서
기침을 하고 있다
겨울나무처럼 쓸쓸하고
정직한 한 사람이 서 있다
--'누군가 내 안에서' 일부

그가 처음 내게 왔을 제
나는 이미
그의 것이었네

부르면 빛이 되는
절대의 그
문 닫아도 들어오네
--'사랑' 일부

 

이곳에서 시인은, 누군가[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며 신의 아들이라는 두 품격을 한꺼번에 갖고 있는, 즉 兩性의 모티프를 제가끔 분리하여 제시한다. 人性과 神性 간의 긴장이 얼핏 보기에는 따로 분화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두 품성은 다음의 시에서처럼 새 질서를 산출하는 자리에서 다시 융합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고통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고
눈물을 안으로 감추며
숨어 계신 어머니
당신의 순명과 겸허한 사랑이
예수를 낳았습니다.
우리를 구했습니다.

당신은 지금도 끊임없이
사랑하는 그 아들을
우리에게 건네주고 계십니다.
--'성모께 바치는 시' 일부

 

결국 이러한 의식이 예인하는 시인의 자아란 절대자 앞에 종복된 형편이므로 늘 부끄럽고('修女1', '雅歌'), 소심해야 ('가을편지lO') 하며, 황홀해야('석류꽃')한다. 그 경계를 풀어젖힌 자아란, 李海仁에게 있어서는 곧장 賣神에 해당한다. 어디서 무슨 힘이 있어 이 각박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기랴의 李海仁은, 타락한 세상, 번다한 삶의 고충을 분에 넘치게 바라보는 일을 대신하여('바다새' 그따위 현실쯤은 일찌감치 폐기해서 좋은 假現으로 간주한다.

 

좋게 말해서 이것은 인간의 정신을 일격에 고양시키는 초월에 대한 승복이랄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해서는 그 현실과 대치하는 응집력이야말로 위험한 것이므로, 신성한 정신과도 다른 것이므로, 사탄에게 배분된 간계의 별칭과 같아서 아예 타기해야 할 이치로 삼은 듯한 인상을 준다. 문학의 보편성을 염두에 두고 보면, 결국 초월이란것도 개인의 감성을 뛰어 넘는 일련의 비합리적인 세계에로의 꿈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속성의 객관적인 사항ㆍ경험과의 대안에서 공기처럼 피어나는 각성으로, 거짓된 세계 혹은 내면의 불온한 유혹까지도 높은 변혁 의지로 깨물어 부숴뜨리는 일종의 借定的인 반성에서 우러난 힘 그 자체로 나에게는 보여진다.

 

그래야 살아 있는 세계와 엉뚱하게 절연된 초월주의의 유령으로부터 문학을 벗어나서, 그 초월의 所與性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인간의 의식과 대상의 절대적 동일성은 유한한 사실적인 의식으로는 원칙적으로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고 헤겔(Hegel l770-l831)의 사변처럼 존재 실현의 주객, 人神의 相違性을 현재의 자의식 속에서 통일하는 그런 대상으로 포착한다면, 문학에 주어지는 유한과 절대의 포석에는 자칫 자기성찰의 오류에 빠지는 순환논리로 묶여질 위험이 따른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李海仁의 시에 있어서, 그러나 저와 같은 위험 부담을 극복하고 기독교 시로서의 보다 넓은 지평을 열어 놓은 작품은 신 앞에 참회하는 자의 경건주의를 비판하고 나타난 다음과 같은 시에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i)
당신을 모르노라 고개 흔드는 베드로와
나도 시시로 악수를 나누는데
그래도 당신이 왕이십니까
……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당신의 집은 보이지 않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내가 죽지는 못해
내 안에 그대로 죽어 계신 분이여

어떻게 당신을 살려내야 합니까
제발 큰 소리로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이 왕이라면
----'당신이 왕이라면' 일부

ii)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엄청난 당신보다는
덜 힘든 한 사람을 선택하겠습니다
나의 뜻과 어긋나는 당신이기에
나는 놀라서 도망치다
신들린 바람

내가 만약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사랑이신 당신을 모르고 싶은
죄스런 바램을 어찌해야 합니까
呪文 외며 달아나다
내가 쓰러질 곳 또한
당신 품안일 것을
--'다시 태어난다면' 전문

 

i)과 ii)의 시는 다같이 예수를 경험대상의 근본으로 인지하며 씌어진 작품들이다. 기독교 시는 물론 앞에서도 누누이 언급한 것처럼 그 신앙의 본원적인 대상인 예수를 하느님이요, 사람이라고 믿는 가운데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거룩함과, 속됨의 二重二元的인 역설을 수용하면서 그 시적인 내질성을 확보한다. i )은 시어상의 진술로는 존재론적 역설ontologial paradox을 좇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신앙적인 진실을 설파하고 있다. 그렇찮아도 종교 자체는 직관에 의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까닭에 어차피 논리의 단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종교시의 경우에는 이 함수가 더욱 심대해짐으로 역설을 통해서라야만 긴히 진리를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도 ‘내가 죽지를 못하는’ 이유가 당장에 그분이 ‘내 안에 그대로 죽어계신' 원인이 된다고 말하며 끝 연에 이르러서는 저러한 비약을 더욱 증폭시켜 불사의 그리스도가 죽었다면서 절규한다. 이 反개념을 ii)의 시에서는 다시 한 번 뒤집어 非모순의 법칙law of non-contradiction으로 환원시켜 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 인간의 평범한 목소리를 통하여 종교적인 인간의 정직성을 겸허하게 증거하는 표현을 이룩한다. 그러나 정작 위의 시의 매력은 다른 이유에서 결정된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특별히 위의 시가 독자에게 어떤 시적 감응을 가지고 다가오는 까닭은, 다름아닌 시인 자신이 본의든 아니든 그밖에 여러 작품들 속에서 고수해 오던 완강한 틀, 신앙의 성취를 비로소 재조명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즉, 시인은 초월자 앞에서 자기자신의 좌절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경험은, 기실 신을 부인한 자로서의 단순한 참회를 고백하고 있는 引喩라고는 볼 수 없다. 이제야 시인은 이 '당신이 왕이라면', '다시 태어난다면'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신앙을 詩化하게 되는 긍정적인 측면, 그러나 궁극적인 체험으로써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반응인, 신의 현시revelation를 존재론적으로 수락하게 된 것이다. 아니다. 시인은 마침내 자기좌절, 인간의 한계 그 자세의 본래적인 근거로 신의 존재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상상력이 시키는 날조된 신의 假現이 얼마나 시의 예술적인 가치를 훼절시키는 것인가를 또다시 상기할 필요도 없겠다.

 

선에 관한 명상, 이미지, 정서적 환기는 다만 저러한 정직성을 진술하는 데에 따른 보조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종교식 사유의 관념에는 신을 심리적인 모상으로 이해하는 데는 유익할지 모르나 인간의 내성에서 살아 숨쉬는, 끊임없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현존재’의 의미를 떠올리는 해석학Hermmanics의 趣意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위 시들이 성공한 까닭만 해도, 다시 말하거니와, 시 자체가 챙기고 있는 형식상의 기술로 말미암은 것이라기보다 신 앞에 정말로 마음을 비울 수 있있던 시인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겠다. 이 비움은, 절대 앞에서 인간은 소멸한다는 자각이다. 실제로 그의 깔끔한 시 「살아 있는 날은」에는 다음과 같은 결구가 씌어 있어 주목할 만하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읍니다

그렇다면, 반면에 악에 대처하고 있는 李海仁의 시를 한번 더 읽어보자.

상처받은 가슴은 쉬이 아물지 않고
절망 속엔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더 이상 긴 말씀 못 드리지만
하여튼 요즘은
기도가 잘 되지 않아요 하느님
--'빗속에 드리는 기도' 일부

때가 되면 황홀한 문을 여는
꽃 한 송이의 준비된 침묵을
빛의 길로 가기 위한
어둠의 터널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또다시 당신 앞에' 일부

 

아직 시인의 신인식은 황홀한 꽃의 향기-그것은 자연물에서 분비되는 취각일 뿐이다-에 감싸여 있다. 죄악은 은폐되었다. 죄악을 뒤집으면 생명의 불꽃이 피어 오른다. 그 모양을 붙잡아 시로 옮기는 언어에 대하여 시인은 먼저 고민했어야 된다. '하여튼'이라니, 이 무슨 몽매한 부사냐? 이제 시인의 신인식은 낯선 누구(<病日床記 1 ·2>), 바람(<바람의 詩>)의 몸, 또는 혼자 있어도 풍요로워지는 빛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에 대한 자구적인 선망의식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하느님 앞에서의 참다운 소멸이란, 시인의 인간됨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 없이 구축해 놓은 가치일변도-이를테면 唯美的 ·唯心說的인 外顯性에 매몰되었던 시각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적인 실존으로 돌아오는 인간에로의 복귀를 뜻한다.

 

여기에는 실로 그동안 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게 놀았던 신에 대한 편향이라든가, 아니면 인간의 본연으로도 얼마든지 흡족한 그 일상적인 동태를 찬미하려는 미봉책 따위는 없다. 인간의 고뇌가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난 연후에야 신을 맞이하는 기쁨도 크다는 것을 독자들은 벌써 깨우쳐 알고 있다. 끝으로 나는 시인에게 한 마디만 더 우문을 묻고 싶다. 시 속에도 하느님은 있는가?

 

1988년 시문학 3월호 집중분석 세칭 베스트셀러시집 / 안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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