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수녀님에 관한 글
 
소제목(小題目)의 다섯가지 이야기
시와 의식 - 1985. 겨울호 / 이상범

        시인의 사명

<25時>의 작가 게오르규, 그는 신부다. 25時라고 하는 타이틀이 암시하듯이 가공의 시간이다. 기대했건만 와주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꿈으로만 그리는 시간이지 결코 현실로는 없는 시간이란걸 우린 짐작한다. 그런 의미로 보면 '제 8요일'(플라스코作)도 그와 유사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게오르규는 이미 한국엘 몇 번 다녀간 사람이다. 가 남긴 말 가운데 다음의 말이 오래 내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시인이 괴로워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한 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시인이 마음 놓고 호흡하며 행복해 하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되살아 난다.
 

연탄가스의 위험도를 측정키 위해 카나리아를 기른다고 했다. 카나리아가 맑고 고운 노래를 부를 때는 정상적이지만 그 울음이 작아지거나 울지 않을 때는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카나리아는 상황의 위급함만 알리고 저 자신은 목숨을 다한다는 것이다. 딱하고도 거룩한 이야기다. 우리 사회는 과연 시인이 괴로워 하는 사회인지 아니면 행복해 하는 사회인지 잘은 몰라도 전자에 속하는 부분이 꽤나 많은 것 같다. 일테면 위험수위를 예고하고 있다고나 할까. 한데 우리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북녘의 두고온 산하는 과연 어떤가?

 

이미 그곳은 카나리아로 말하면 아예 울음을 그쳐버린 땅이거나 병든 울음만 간간히 들릴 뿐이다. 시인이 사회를 측정하는 측정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니 그 기능은 이미 소멸된 지 오래다. 다만 병든 노래라도 하지 않으면 식물인간이라고 해야 할 원초적인 삶마저 영위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목적에만 근거를 둔 당(黨)이라고 하는 기계의 부속물이 된지 아주 오래 되었다고 알고 있다. 어떤 기회에 나는 그들의 신문을 잠시 대한 적이 있다. 시가 있길래 잠시 들여다 보았다. 제목부터가 일종의 구호였다. "5백만톤 생산가"였으니 말이다. 나는 그 하나만 보아도 그 사회의 단면과 아니 전면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스스로는 이 시대의 아픔, 이 시대의 괴로움을 얼마나 냉정하고 올바르게 수용해 왔는지 자문해 본다. 어쩐지 부끄러움이 앞선다. 이 시대의 충실한 측정기의 역할을 못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시의 存在와 의미

 

가을이 되면 많이 볼 수 있는 문화행사의 하나로 '詩낭송의 밤'이 있다.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도 이미 2회의 '시낭송의 밤'을 치렀다. 바쁘고 각박해진 직장생활에 활기와 기를 불어넣기 위한 뜻에서 시작했다. 문학부의 시동호인과 찬조시인, 그리고 초대시인이 함께 했다. 이름하여 '詩와 음악이 있는 낙엽제(祭)'였다. 시낭송 사이 사이에 노래를 곁들인 행사였는데 200여명이 모인 행사로서 일단은 성공이었다. 왜 이런 행사를 진작 착안 못 했을까하고 좋아라 했다.

 

이 행사를 마련하고 당시 필자는 사회를 맡았었다. 사회의 서두를 암기하지는 못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여기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낙엽제의 행사가 다소 늦어져 오히려 차가운 날씨가 되어 버렸읍니다만, 오늘 갖고자 하는 행사는 무척 따뜻한 영혼과 사랑의 이야기가 되어 여러분의 마음 구석 구석을 적셔줄 것으로 믿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100년이 지났다고 생각해 보렵니다. 아마 이 자리에서 사회를 보는 저나 제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시는 여러분이나 이 지상엔 한사람도 살아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두 저 세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아들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증손자들이 이끄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한번 생각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명예입니까 아니면 돈입니까 누가 얼마나 큰집에 살고 아무개가 영전을 했다는 사실이 그리 큰 중요성을 갖는 것입니까. 크게 명예를 얻은 몇몇분은 그 직함이 자그마하게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서민의 한사람으로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고 말 것입니다.그저 평범한 삶을 영위하다가 대부분은 기억속에서 지워질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지상에서 해야할 일은 보다 자명해 질 것 입니다. 가까운 이웃을 사랑하고 보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아껴야 한다는 사실 앞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 직전에 가장 선해지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항시 죽음과 함께 사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때쯤 되면 이 최신식 건물도 노후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해야 하거나 개축이나 신축이 불가피할지도 모릅니다. 이웃의 대지를 매입하여 공원을 조성할는지도 모릅니다. 이 거대한 조직의 명칭마저 바뀔는지도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잔사설을 그만 두고 시낭송의 순서로 넘어 가겠읍니다. 이제 시를 시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자리가 마련되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이 지상에 존재하는 한 시대는 변해도 시는 살아 숨쉴 것이며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흠씬 적셔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읍니다. " 조명이 비치고 조용한 백뮤직이 흘러 나오는 가운데 시낭송이 시작되었다.

 

詩와 그림

 

우린 가끔 시화전(詩畵展)을 본다. 필자가 대구에 제복의 몸으로 있던 시절이었다. 서정주, 박목월, 박두진씨 등 기라성 같은 시인을 비롯한 여러분의 시에 중진 및 중견화가들의 작품을 곁들여 시화전을 하고 있었다. 한데 재미난 결과가 나왔다. 아니 솔직히 말해 슬픈 결과가 나왔다. 당시만 해도 화가들의 작품이 그것도 유명화가들의 것이면 마구 팔려 나가던 시절이었다. 시화를 감상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시화를 사겠다는 화상(畵商)들이 제법 나왔는데 그것이 묘했다. 시화에서 시를 잘라버리고 표구가 가능하냐 아니냐 하는데 따라서 시화의 값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림에 시가 곁들여지면 제값을 받지 못하는데 시를 잘라버리면 그림값이 나간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유명시인의 작품이라 해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가. 이는 황금만능의 풍조도 풍조려니와 신흥부자가 당시 속출했고 또 주거환경이 핵가족시대의 부산물로 아파트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벽면의 공간처리를 그림으로 하는 것이 품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걸자니 이름이 있는 작품이 필요했던 것이다. 허세가 작용한건 말할 것도 없지만 이를 편승한 약삭빠른 화상의 상혼이 문제였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엔 상당수의 화가들이 그림의 창조성 보다 차라리 같은 그림을 복사했다고 하는 말이 옳았을 정도 였다.

 

그때 시인들은 이같은 정경을 보고는 "에이 빌어먹을 그따위 시를 밤을 새워가며 써야 하다니 이젠 시업(詩業)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투덜대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현재에 와서 모두 배제된 건 아니다. 지금도 그와 비슷한 현상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화가의 경우는 시를 위해 기꺼이 그림을 그려주는 분들도 있다. 설혹 시가 들어서 값이 떨어져도 말이다. 얼마전의 시화전에선 그래서 10만원 정도면 유명화가의 시화를 살수 있었다고 들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이 같은 기현상이 계속될 것인지....... 하긴 그림을 감상하는데 시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말도 없지 않다. 한 시대 문화를 주도했던 시의 위치를 바라보면서 수수로워진다. 이는 곧 문화 풍토의 건전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담만은 하지 않는다. 근래에 와 시가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가닥 반딧불 같은 희망이라도 지녀야 할 것 같다.

 

이해인(李海仁)의 시

 

요즘 베스트셀러 1위에 이해인의 시가 꼽히고 있다. 필자는 다행히 수녀시인인 이해인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간혹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만약에 절대자가 시를 택하든지 신앙의 길을 택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하면 나는 시를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나이에서 한 10년쯤을 뺀 그런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는 말의 표현으로 보면 어른이 아닌 어린이와 이야기 한다고 할만치 천진스러운데가 있다. 말하자면 몸에 밴 신앙생활, 기도로 잘 닦기고 씻겨져서 걸러낸 심성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느껴졌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절대자를 향한 간절한 기도의 언어다. 그만큼 정화된 시의 빛깔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도 난해의 구석을 찾을 수가 없다. 어찌보면 단조로움마저 눈에 띈다. 허나 기도로 태운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의 심금에 잘 배어든다. 그런 그도 고충이 없지 않은 듯 했다.

 

일테면 흔히 대하는 기도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란다. 하느님이라고 할 수 만은 없어 임금님, 혹은 왕, 혹은 크신 당신이라고 하는 등 일상을 극복하려는 흔적이 곳곳에 꿰비치는 것이었다. 더욱 그의 시를 한마디로 순명(順命)의 시라고 나는 보았다. 절대자에게 바치는 헌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엔 구도자인 수녀라고 하는 진한 굴레를 벗지 못하는 제약이 뒤따르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그같은 건 그의 생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지금도 수습수녀들의 가르침과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줄로 안다. 몇년전에 을지로에서 그를 만났다. 얼굴이 많이 여위어 있었는데 지금 대학원과정을 밟고 있다며 "나이 들어 공부하기가 힘드네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10여년전에 부산 해운대 근방 광안리수녀원을 안내받았던 시절과는 많이 변해 있있다. 그만큼 세월이 지나간 흔적이 역연했다. 최초의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낼 무렵부터 교우가 시작된 것인데 그의 생활에서 난 커다란 긍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 혼에 불을 놓아> 또한 근래에 선보인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를 받고는 그의 한결같은 정열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잘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무엇보다 쉽게 이해된다는 큰 이점을 지니고 있다. 난해성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가 사랑의 대상자로 삼고 있는 절대자에게 쏟는 사랑이 바로 누구의 가슴에도 잘 젖어 든다는 사실이다. 그가 풀어가고 있는 사랑의 이미지는 모두에게 품위와 숭고함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가 수녀라고 하는 구도자의 위치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쓴다는게 안이함이 아닌 바에야 오늘의 시가 안고 있는 난해성의 극복이라는 면에서 폭넓게 받아 들여져야 한다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아뭏든 그의 시가 읽힌다는 것은 시의 저변확대라는 의미에서도 크게 환영해도 무방할 것이다. "언제 시 구상을 하지요?"하고 묻자 "제가 구도자이니 만치 기도시간을 이용할 수 밖에 없지요. 천주님도 아마 이해해 주실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러니 절대자가 시와 신앙중 양자택일 하라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와 신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한몸일테니 말이다. 그러니 분리해 생각할 수가 없다. 그의 시의 참된 면모를 대할 수 있는 다음 시 한편을 옮겨 본다. '살아있는 날은'이란 시다.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있는 연필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어느날 전철을 타게 되었다. 옆에 앉은 공단 소녀가 펴든 시집이 이해인시집이었다. 무크지에 공단 종업원에 대한 시가 많이 실려 있는데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잘 안 읽혀요. 무슨 구호같았어요. 꿈이 없는 것 같았구요. 그래서 이 시집을 읽고 있는데 마음이 무척 따뜻해지고 위안이 된다"며 마지막으로 "저희들도 꿈이 있거든요"하고는 다시 시를 음미해 가고 있었다.

 

시인의 마지막 모습

 

김종삼시인은 이미 타계한 시인이다. 최근 4,5년간은 그에게 있어서는 죽음과 같이 생활해 온 시인으로 내겐 비치었다. 그의 시 자체는 이미 죽음과 함께 살고 있었고 대결(?)하고 있는듯 싶었다. 그만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시의 대상으로 삼았던듯 하다. 그의 시를 대하고 읽어가노라면 이미 세사의 찌든 옷은 벗어 버린 상태였다. 벗었을뿐 아니라 고성(古城)에서 들리는 소리, 거기에 피어있는 한송이 풀꽃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닿았던 것은 어찌보면 신기하고 이상할 정도였다.

 

몇해전 가끔씩 나의 사무실을 찾아주었다. 그 실은 나를 찾은것이 아니라 한 사무실에 있는 K시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여간해 그러지 않던 K시인도 그에게 가장 짧은 시 한 편을 육필로 적어 달라고 했었다. 그때 김종삼시인은 글씨도 시원찮은데 하며 꼭 국민학교 1학년 학생의 꾸밈없는 반듯한 글씨체로 크게 적어주었다. 그만 피식 웃음이 나올 법 했다. 그리곤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떠나갔다. 한번은 계간문학지의 L기자가 보니 이미 꺼풀만 남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더란다.

 

마지막이거니 싶어 작품청탁을 했더니 3편을 보내왔는데 그중 한편은 사자(死者)와의 교신과 같았다고 술회했다. 물론 그 작품이 마지막이었지만 다른 문예지 보다 다소 액수가 많은 원고료를 받고는 어린이처럼 좋아 하더란다. 살아서 이불 한 채 그릇 몇 개만 소유했던 그는 저 세상에서 무얼 소유하고 있는지 그게 제일 궁금하다.

 

시와 의식 - 1985. 겨울호 현역문인(現役文人) 대표(代表) 에세이집(潗) 영혼(靈魂)의 꽃불을 터트리는 언덕에서

다음글   이해인(李海仁)의 일련의 시집 (詩集) - 시(詩)와 신(神)
 이전글   이해인 수녀의 시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16(구 동숭동 1-115) 샘터빌딩 4층 (주)샘터사 전화 02)763-8965 팩스 02)3672-1873
Copyright ⓒ 2000 Samtoh. Co., Ltd.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