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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수녀의 시세계
/ 권국명

        사랑과 기도의 체험

詩를 知的인 논리구조로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모더니즘 운동 이후에 일어난 시의 현저한 움직임이다. T.E.흄과 파운드와 엘리어트로 이어지는 영미 현대시가 그렇고, 발레리 이후에 나타나는 프랑스 순수시가 또한 그렇다. 이러한 생각들은 시를 주로 '지성' 쪽에서 보고 있는 셈이다. 지성이라는 것이 사물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시에 있어서의 지성은 그러니까 시(事物)의 내용보다 시(事物)의 내용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방법'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다.
 

방법이 내용(意味)에 새로운 차원의 빛을 던져 인생과 사물의 질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현대시가 난해한 두드러진 이유중의 하나는 이러한 방법에 대한 자각과 실험성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방법에의 관심을 극단적으로 몰고나간 것 중의 하나에 초현실주의 시가 있는데, 초현실주의시가 인간의 심층심리를 '자동기술법'으로 드러내면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지성을 가장 기피하는 시면서도 그런 것을 드러내는 방법 쪽에서 본다면 거기에는 냉엄한 지성의 힘이 도사리고 있다할 것이다.

 

현대시의 대부분은 이 '방법'에 대한 지적 접근의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李海仁 수녀가 지금까지 펴낸 3권의 시집들을 읽어보면, 현대시가 '지적방법'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을 본다. 그러니까 그는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현대시가 가고 있는 방법중심의 작시태도에서 벗어나 그런 영향권 밖에 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10년에 걸쳐 낸 이 세 권의 시집은 상당한 시간적 거리를 두고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보는 태도나 입장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어떤 변화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지가 않다. 거의 요지부동이다. 그가 신앙처럼 믿고 있는 것은 시가 '사랑과 기도의 체험이며 표현'이라는 완강한 생각이다. 이것은 시가 결국 '사랑과 기도'와 동일한 차원을 지향한다는 뜻이 된다.

 

시인이 지향하는 '사랑과 기도'라는 의미 내용과 시라는 방법이 가지는 예술적 차원 사이에 놓일 수 있는 거리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의지 그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시인의 의지 쪽에서 본다면 매우 엄숙한 태도이기는 하지만 시라는 예술의 차원에서 본다면 한편으로 소박한 단순성을 드러낸다. 방법에 대한 무자각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더러는 이런 태도를 의도적으로 가질 수 있다. 릴케가 그런 시인이다. 그는 지성과 방법을 거부하고 있는 시인이다. 중요한 것은 영감과 심성의 위대함이다.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면 시가 된다. 방법이나 지성은 오히려 불순하기 까지 하다. 조작이 끼어들 수 있다는 태도다.

 

李海仁수녀의 시는 그러니까 이런 태도를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그의 시의 배후에 거느리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런 감각은 어쩔 수 없이 윤리성을 띄게 마련이다. 현대시가 방법 쪽으로 치우치면서, 시인과 시 사이에 현저한 괴리현상을 드러내고 있는데 대한 일종의 반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방법에의 지향은 시에 있어서 '푸라토니즘'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발전된다. 말하자면 시가 미학의 어떤 부분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지, '인생의 진실'을 반드시 말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윤리로부터 자유로와지려 한다.

 

인생의 진실을 말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윤리적 결단이 필요하다. 현대시는 그런 윤리적 결단과는 무관한 입장에 서려 한다. 그러니까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와지려고 한다. 어떤 홀가분한 방심상태 그것이다. 이런 태도는 허무 쪽으로 한 발을 내디디고 있는 것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자유의 아슬한 경계로 몸을 내미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에는 시가 있어 온 이후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내용에의 관심 말하자면 시가 인생의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푸라토니즘 쪽에 서서 시를 보는 시인들이 현대에도 필요한 것이다.

 

비교적으로 말한다면 이들은 시의 방법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가 문제다. 그러니까 시인 자신의 인생이 문제된다. 내가 얼마나 나의 생활에서 시적 상태를 유지하고, 내 자신이 얼마나 진실한 시의 의미가 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시가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가 된다. 로맨티스트의 감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와 시인 사이에 놓인 거리감이 사라져 버리는 상태다. 소박하다고도 할 수 있고 시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李海仁 수녀의 시가 놓이는 공간이 여기쯤이다. 그의 세 권의 시집에 수록된 어느 시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움직일 수 없는 윤리적 이념이 도사리고 있다. 그 이념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변화가 있다면 후기로 올수록 그 이념이 더욱 치열해 가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해인 수녀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이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과 기도의 체험과 표현'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들을 보자.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제 1 시집 중 '민들레의 영토' 1 연-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의 생애는
당신을 향해 열린
아침입니다.


-제 2 시집 중 '나팔꽃' 1 연-

 

누군가 내 안에서
기침을 하고 있다.
겨울나무처럼 쓸쓸하고
정직한 한 사람이 서 있다.


-제 3 시집 중 '누군가 내안에서' 1 연-

 

3권의 시집에서 임의로 뽑아본 이 세 편의 시에서 우선 드러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이념적 접근이다. 대상이 이념(종교적)에 의해 심리적으로 변형되고 있다.

 

법을 거부하는 방법

 

말하고자 하는 테마(theme)나 이념이 승할 때, 대체로 시인은 시의 방법면을 등한시하기 쉽다. 등한시 한다기보다 이념과 방법은 그만큼 한 시인의 내면 속에서 행복하게 결합되기가 어렵다. 참으로 훌륭한 시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한 시인의 생애를 통해 끊임없는 변증법적 지양을 함으로써 얻어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시에 대한 이러한 틀을 가지고 이 해인 수녀의 시세계를 살펴보면 그는 우리의 기대를 모두 배반하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발간한 세 권의 시집을 놓고 볼 때, 첫 시집이나 제 삼 시집 사이에는 시의 형태나 운율이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법적인 면에 이렇다할 자각적인 변화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의 시 형태는 의도적이고 계산된 형태라기보다 소박하고 자연 발생적인 것에 가깝다. 그의 운율은 담담한 어조처럼 간결하고 순수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긴장과 자극을 수반하는 격정적인 어조와는 관계가 멀다. 그는 이미지를 비유적 (metaphorical)으로 쓰고 있다. 모든 이미지의 배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지탱하는 종교적 이념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세 권의 시집이 보여주는 일관된 특색이다. 방법에 대한 의도적 추구나 변화가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후기로 올수록 그러한 방법적인 문제들을 거의 방기해 버리고 있는 느낌이다. 방기해 버린 만큼 이념 쪽으로 더욱 치열해 갈 뿐이다. 이런 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앞에서 말한 대로 이념에의 경사 때문이다.

 

이념(종교적)과 시인 사이에 가로놓인 한 치의 간격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럴 때 그가 이념으로 믿고 있는 사랑과 기도의 실천 의지가 곧 시 그 자체가 된다. 또 그 역도 가능하다. 다만 그에게는 그 기도와 사랑의 질적인 내용만이 문제가 된다. 얼마나 자기 진실에서 우러나온 기도와 사랑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는 시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기도와 사랑을 바치고 표현하는 도구일 뿐 이지 시 그 자체가 무슨 뜻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이 해인 수녀의 이런 태도가 좋다든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방법에의 거부의식이 시의 새로운 또 하나의 다른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에게는 그런 면이 있다. 우리 현대시가 오랫동안 골몰해온 방법에의 지향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시에 대한 새로운 신선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신선감은 소박하고 건강한 감각이다. 그의 시가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많이 읽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꽤 까다로운 방법에의 천착에 질려버린 독자들이 그의 시에서 새로운 신선감을 느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점에 있어서 그는 하나의 실험대에 오른 셈이다. 그에 대한 관심이 대중적인 호기심에 머물고 마느냐, 흑은 진정한 시의 가치로서 오래 남느냐 하는 문제는 순전히 그의 능력에 달린 셈이다. 그만큼 그는 중요한 시의 몫을 하고 있다.

 

어떠한 소리보다 아름다운 언어 향기
멀리 계십시오. 오히려
千里 밖에 계셔도 가까운 당신
당신으로 말미암아 내가 꽃이 되는 봄
마음은 千里眼
바람편에 띄웁니다. 말 없는 향기로 대신
하여 -


-'千里香' 全文

 

나는 한번도 숨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내가 흰 깃을 치며 無人島로 날아 버린 詩人같은 물새였을 때
뽕잎을 갉아 먹고 긴 잠에 취해버린 꿈꾸는 누에였을 때
海草내음 즐기며 모래 속에 웅크린 바다빛 껍질의 조개였을 때
깊은 가슴 속으로 香을 피우던 수백만 개의 햇살 찬란한 당신 앞엔
눈 못 뜨는 나
부르시는 그 사랑을 듣게 하소서

-'부르심' 1~7연 -

 

뒤의 시 '부르심'은 1975년에 발표한 것을 이듬해 발간한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에 다시 실은 작품이고, 앞의 '千里香'은 198년에 상재한 세번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에 실린 작품이다. 임의로 뽑아 본 이 두 편의 시는 그의 시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적 거리를 두고 쓰여졌으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또 기법에 있어서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부르심'은 시상의 전개가 기도의 톤(tone)에 가깝다.

 

이 점 '千里香'도 마찬가지다. '부르심'보다 비유의 밀도가 짙을 뿐이다. 千里香을 당신으로 환치시키면서 하느님으로 비유했다가 다시 시 속의 話者 자신이 천리향으로 암시되기도 한다. '부르심'은 화자인 내가 보다 직접적인 비유를 통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용되다가 마침내는 햇살인 당신(하느님) 앞에서 존재를 숨기지 못하고 당신의 부르심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부르심'이 보다 직접적인 표현이라면 '千里香'은 그보다 조금 미묘한 음영을 던지고 있다고 할까. 그러나 주제는 모두 같은 세계다. 하느님에게 자신을 아름답게 열어 놓고 봉헌하겠다는 심성 그것이다. 두 편 다 비유를 쓰고 있으면서도 복잡한 의미상의 굴절이나, 정서의 비약은 없다. 그만큼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에 대한 관심이 대중적인 호기심에 머물고 마느냐, 진정한 시의 가치로서 오래 남느냐 하는 문제는 순전히 그의 능력에 달린 셈이다.

 

3권 시집에는 말미에 모두 산문 형태의 시를 싣고 있다. 산문시라고 하기보다는 서간 형식으로 된 자기 고백과도 같은 아름답고 순결한 영혼의 언어가 있다. 어느 것을 보아도 그의 시의 배후에는 사랑과 기도의 간절한 바램이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존재의 슬픔'을 감득할 수가 있다. 존재의 연약함과 덧없음에 대한 자기 확인에서 오는 그 비애의 체험이다. 이 해인이 신의 은총 속으로 아름답게 더욱 가까이 다가 갈수록 우리는 그 슬픔의 실오리들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내 탓이 아니다. 그리고 물론 또 내 탓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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