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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시론
창작과 비평 1976년 여름호 / 김영무
이해인(李海仁)의 첫 시집 <민들레외 영토(領土)>에는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라는 제목의 제 3부에 실린 일종의 시적 기도문 10편을 포함해서 모두 44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이 작품집을 통독하고 났을 때 우리마음 속에 떠오르는 시 속의 주인공의 모습은 일상적인 현실생활과의 유대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외로운 사람의 모습이다.
 

그의 눈에 미친 현실 세상은 '흐려오는 세월'이요 '그림자만 데리고 저만치 손 흔들며 앞서 가는 세월'이며 '눈물 고여 오는 세월'이고 '고난에 멍든 세월'이다. 이러한 세월 속에 사는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원이 너무 커 갈대처럼 여위는' '기다리는' '목놓아 울고 싶은' '초라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들이 짙은 어둠과 절망에 물들지않고, 고 투명한 종소리처럼 아름답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이 소박한 노래들에 담긴 감정의 순수성과 진실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의 진실성과 순수성은 수녀(修女)인 작가 자신의 진실한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가까이 들려옵니다. 빛나는 새아침을 맞기 위하여 밤은 오래도록 어두워야 한다고 --아직도 잠시 빛이 있을 동안에 나는 끔찍이 이 세월을 아껴 써야 한다고 --중략(中略) 아직도 가득차 있는 나의 잔을 보다 아낌없이 비워야 한다고 --네 그래요,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분명히 들려옵니다'라는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듯이 빛이 있기 위해서는 어둠이, 만남이 있기 위해서는 이별이, 채워짐이 있기 위해서는 비움이,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기독교적인 삶과 죽음의 변증법이 이해인(李海仁)의 시의 기본적인 체험 구조를 이룬다.

 

몸달아
기다리다
피어오른 숨결

오시리라 믿었더니
오시리라 믿었더니

눈물로 무늬진
연분홍 옷고름

남겨 주신 노래는
아직도
맑은 이슬

뜨거운 그 말씀
재가 되겐 할 수 없어

곱게 머리 빗고
고개 숙이면

바람 부는
가을 길
노을이 탄다

 

-'코스모스' 전문(全文)

 

시인은 가을길에 피어 있는 가냘픈 코스모스에서 이슬 같은 맑은 노래를 남겨놓고 떠나가서는 끝내 소식 없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읽으며 (첫 네聯) 또한 임이 들려준 '뜨거운 말씀'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용히 머리 숙여 임의 듯에 마르는 순명(順命)의 자세를 발견한다(마지막 세 聯). 임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은 각각 '몸달아' '숨결''연분홍' '뜨거운''노을이 탄다'등 뜨거움을 나타내는 표현들과 '눈물' '이슬' '재' '바람' 등차가움을 나타내는 표현들의 긴장 속에서 인상적인 균형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 간절한 기다림과 슬픔은 만남에 대한 확신과 順命에의 의지에 의해 일종의 '행복한 아픔'이 된다. 이것과 비슷한 발상에서 나은 작품으로 '민들레의 영토'와 '六月엔 내가'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이 값싼 감상에 떨어지지 않고 시적인 감동을 획득하는 것은 그 배후에 깔린 잔잔한 죽음의 음악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애처로이 쳐다보는
人情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江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 '민들레의 영토'에서

 

숲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六月
六月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中略)
生命을 향해
하얗게 쏟아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六月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욱 살아

山기슭에 엎디어
찬비 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 '六月엔 내가'에서

 

李海仁의 작품세계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작품들이라 할 때 우리는 이 시집에서 어떤 괄목할 만한 형식상의 실험이라든가 위대한 사상이라든가 경탄할 만한 언어구사력이라든가 깊고 날카로운 문제의식이라든가 하는 것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평범하다면 평범한 이 시집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까닭은 작가의 절실한 종교적 체험에 바탕을 둔 감정의 진실성과 순수성 때문이라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이 시인에게 있어 현실세상이 고난에 멍든 눈물의 세월일 수밖에 없고 자신의 모습이 초라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기다리는 '그이'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집 곳곳에서 '그이'는 너무 눈부시어 고개를 들 수 없는 태양으로, 어둠을 걷고 노래를 주는 바다로, 그러면서도 항상 침묵하는 존재로, 춥고 어두운 땅에 누워 하얗게 사위어 가는 존재로, 시시로 버림받고 시시로 잊혀지는 존재로 즉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죽음으로서 다시 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바로 李梅仁 수녀의 시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고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감정 및 사상의 진실성과 순수성은, 다시 말해서 현실생활의 구체적인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어떤 초월적인 원리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그것이 아무리 진지하고 성실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칫 공허한 관념으로 떨어질 위험을 항시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이 시집의 많은 작품들이 시적인 구체성을 얻지 못할 단순한 감정의 토로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어쩌면 이런 식의 종교시가 극복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우리는 "누가 뭐래도 詩는 나에게 있어 생생한 기도의 체험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거짓이 아님을 확신한다"는 李수녀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너' 없이 태어날 수 없던 '나'의 詩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그녀의 믿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매우섬세한 감수성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만만치 않은 솜씨를 보여준 몇몇 작품에서처럼 그녀의 시가 한 수도자의 신앙고백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것이어야겠다는 생각을 아울러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해방된 자유로운 인간이나 근원적인 질서에 대한 신념은 그것에 대한 단순한 신앙고백을 통해 일거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일체의 것 - 눈물, 감상, 도피, 고독 등과의 싸움, 궁극적으로는 죽음과의 구체적인 싸움을 통해서 거듭 새롭게 다져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과 비평 1976년 여름호 / 김영무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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