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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론] 마르지 않는 신앙의 샘에서 물을 퍼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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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학평론가 :  손희락


1: 서론

 

시인 이해인은 1945년, 이 땅에 태어나 깊은 믿음과 신앙이 없이는 걷기 어려운 수녀가 되었다. 그가 수녀로써 예수의 부름을 받은 개인적 사건이 특별은총에 속한다면 1976년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내어 놓으며 문단에 데뷔한 사건은 또 다른 신의 일반 은총에 속하는 그가 감당해야 할 달란트이며 고귀한 사명이라고 할 것이다.

한국문학사를 통해서 이해인 만큼 다양한 작품을 발표한 시인도 드물고 그의 시를 즐겨 읽는 독자층이 두터운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지엄한 말씀이 있는데 그의 시가 근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어 내려오면서 국가를 경영하는 정권도 수없이 바뀌고 인간의 의식 구조와 가치관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치는 변화가 일어났지만, 변함없이 종파를 초월해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의 문학과 신앙, 언행일치를 요구하는 일반 독자들의 높은 도덕적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도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 맑은 감성을 가지고 글을 쓰는 시인이나 경건한 그룹에 속하는 성직자들에게는 자신들과는 구별되는 순결한 삶과 도덕성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 이해인은 열정적인 창작과 다작의 작품 활동을 통해서 꺼져가는 시단의 불꽃을 지켜 왔는데,

그의 작품들이 평론가들의 논의대상에서 늘 제외되고 한쪽으로 비켜 서 있는 것은 서정적이고

시류적인 경향의 시들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인간이면 누구나 입성하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세계,

영원한 천국을 지향하며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문학의 장르 중에서도 소설이나 수필과 달리 현대시가 품고 있는 난해성 [obscurity] 때문에

독자들은 시문학과 점점 멀어지고 있어도 시인들은 독창적 문학성을 내세우면서 의도적으로 난해하고 이해가 어려운 시를 창작하고 있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 산업주의 문명과 과학의 발달, 쾌락적인 현실과 비교되는 문학적, 감수성의 괴리감을 벌리면서 시 인구의 저변 확대에 실패하고 있다고 할 것이며 현대인들은 사랑, 동정심, 배려 같은 부드러운 성품을 자신도 모르게 상실하면서 이기주의적인 존재들로 급변의 탈바꿈을 하고 있다.

시인 이해인은 문학이 갖고 있는 난해성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방향을 상실한 채, 인생길을 걷고 있는 감성이 병든 인간들을 향해 간절히 기도 할 뿐 아니라

문학적인 작품, 한 편의 시를 통해서 그들의 손목을 잡아끌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해석될 수 있는

종교적이고 소망적인 기도 시를 통해서 그들을 사랑의 가슴으로 차별 없이 끌어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고로, 시인 이해인은 시대적인 현실배경이나 이즘을 초월, 신학적 진리에 가까운 독자적인 문학노선을 지향하고 있는데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신앙문학, 혹은 천국문학 노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평자는 그가 발표한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1999년 도서출판 열림원에서 내어놓은

그의 시집, “다른 옷을 입을 수가 없네.”를 중심으로 작품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문학적 작품을 통한 강론


이해인 시의 지배적인 톤은 부드러운 회초리 성격의 교훈적이어서 문학적 작품을 통한 강론을 대신하고 있다. 강론은 카톨릭 성직자들 중에서도 신부에게 주어 진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특권이고 집행이지만, 그의 기도 시들은 행간과 행간을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하나의 강론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런 작품의 특성 때문에 독자들은 그의 시에서 또 다른 깨우침을 얻어 성공적인 신앙생활에 보조적 교훈으로 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해인의 작품들이 일반 시인들의 글과 다른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 시인들의 글은 여러 번을 읽어도 이해가 어렵고, 설사 이해를 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결실을 얻기가 어려운데 반해서 이해인의 시는 그 글을 읽고 있노라면,

자신이 드리지 못한 기도문에 근접하게 되고 아, “나도 수녀님처럼 이렇게 사랑하며 기도하며 살아야지” 하는 신앙적 결심을 스스로 갖게 하는 은밀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두고 갈 것도 없고

가져 갈 것도 없는

가벼운 충만함이여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땅 밑으로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보다

하늘에 숨어가는

한 송이의 흰 구름이고 싶은

마지막 소망도 접어두리


숨이 멎어가는

마지막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으면 희미한 빗속에 길이 열리고

등불을 든 나의 사랑은

흰옷을 입고 마중 나오리라


어떻게 웃으실까

고통 속에서도 설레이는

나의 마지막 기도를

그 이는 들으실까


-마지막 기도 전문


이 시는 명 강론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이다.

이제/ 남은 것은 / 아무 것도 없다/ 두고 갈 것도 . 가져 갈 것도 없는 / 가벼운 충만함이여./

이 세상의 밭에 욕망의 뿌리를 내리고 황금사과가 열리는 나무를 심어 놓고 가꾸고 돌보며 자고나면,

사과 개수를 세고 있는 인간들에게 세상 욕심과 애착을 비운 시인의 작품은 독자들로 하여금

아, 어떻게 하면 저런 신앙상태에서 기도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하는

부러운 눈빛으로 동경하며 사모하게 만드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지막 기도라는 이 작품의 탄생 동기는 시인이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한 은총을 입어 갖게 된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3연에서 보면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 /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실제적으로 한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나는 운명의 날은 비밀의 보자기에 싸여 있어서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시인의 고백으로 보아 그는 기도하다가 지금 당장 주님의 부름을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응할 수 있을 만큼 준비된 행복에 젖어 있다. 아마, 신랑 되신 예수의 품에 혹은 성모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그런 기쁨과 신앙적 쾌락에 젖어 있는 상태임을 알 수가 있다.

인간이 죽어도 좋을 것 같은 행복을 경험하는 것은 두 가지뿐일 것이다.

육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서 머리끝까지 뻗어오는 절정의 오르가즘을 느끼고

진한 키스로 사랑을 고백할 때와 영적으로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깊이 기도하다 신비한 하늘의 위로와 천국의 환상을 똑똑히 보았을 때일 것이다.

그 순간 터져 나올 수 있는 신앙고백이 있다면 /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하는 것이었고 이 한 편의 시는 강론보다 더 깊이 있게 기도 시를 읽는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고로, 시인 이해인의 시, 마지막 기도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직관이며

형이상학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기도문의 순수성 역시 그 극치를 담고 있어서 참으로 좋다.

여기에는 고상한 시어가 담겨 있지도 않고 특별한 시적인 기교가 숨어 있지도 않다.

단지 순수한 마음상태 그대로를 한 편의 시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이해인 시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이다. 마지막 결론 부분을 보면 어떻게 웃을까/ 고통 속에서도 설레이는 / 나의 마지막 기도를/ 그이는 들으실까 /

고통 속에서도 설레인다는 말은 역설의 시법이다. 인간은 아무리 성령 충만한 은혜를 입고

세상의 모든 욕심을 다 버렸다고 해도 천국에 입성을 하기 전까지의 기도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통 속에서 나는 설레이고 있다” 고 묘사를 함으로서 그 고통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도가 더욱 애절하고 고귀하며 행복에 젖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으니

강론 중에서도 명 강론이 아닐 수가 없다.

어느 신부나 성직자가 이 보다 더 멋진 강론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나의 기도를/ 그 이는 들으실까/ 시인은 그 분이 듣고 있고 그 내용을 들으시며 흐뭇하게 웃고 계시는

주님이심을 체험하고 있으면서도 시적인 운율을 살려가면서 그 이는 들으실까 은은하게 묘사한 것도

그만의 독특한 시법이고 표현이다.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서 “물론입니다, 수녀님” “그럼요, 그 분은 듣고 계십니다.” 하는 답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면서 기도하고 싶은 자발적 충동 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시인 이해인의 초기 시 [민들레의 영토에서]부터 시작해서 [다른 옷을 입을 수가 없네]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 속에서는 신부들만이 할 수 있는 강론을 시적인 언어로 표현, 강단에 서지 않고도 깊은 강론을 하고 있는 수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진정 축복받은 여인임을 알 수가 있었고,

시집 출간이 거듭될수록 그의 강론은 더 깊은 은혜의 강물 속으로 독자들을 이끌고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3: 시의 특징과 시인의 임무


시인 이해인 시의 특징은 현실적인 환경을 극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걸어가면서

가슴과 눈은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 그곳에 소망을 두라는 종교적 특성을 갖고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현실을 초월하고 무시하고 천국을 바라보는 현실도피성 신비주의자들도 있지만,

세상에서 천국을 향해 한 계단씩 밟아가는 거룩한 본분을 자신이 직접 실천하면서

기도 시로 말하고 있다. 고로, 이해인의 시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 변하지 않듯이

천국을 소개하고 있는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고 아가페적인 사랑을 시적언어로 묘사하면서

시인이며 수녀인 자신의 존재적 지평을 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수녀이면서 시인의 임무를 메타화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신앙의 옹달샘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의 시는 인생을 총망라해서

천주교 신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슬픔과 아픔을 끌어안으면서 관심을 가지지 있고 .

그가 눈물을 한 번 흘리고 나면 그 눈물은 한 편의 시가 되어서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치료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해인 시가 지향하는 시의 세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학이 문학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죽은 문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살아 있다는 증거는 성도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서 눈물을 닦아 주고 소망을 주어서 절망을 극복하는 정신적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녹아 그대로 살아 있다.


삶의 의무를

다 끝낸

겸허한 마침표 하나가

네모 난 상자에 누워

천천히 

땅 밑으로 내려가네


이승에서 못 다 한 이야기

못 다한 사랑

대신 하라 이르며

영원히 눈감은

우리 가운데의 한 사람


흙을 뿌리며

꽃을 던지며

울음을 삼키는

남은 이들 곁에

바람은 침묵하고

새들은 조용하네


-하관 중에서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이다. 본문의 시를 보면 함께 주님을 위해 일을 하던

겸허한 마침표, 노 수녀 한 분이 주님의 부름을 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영원한 삶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죽음이란 관문은 베토벤의 명곡 [운명運命]의 심포니처럼 갑자기

찾아와 바바바방 하고 장엄한 생명의 문을 두드리는 통과의례인줄 알면서도

기독인들은 박수를 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잠시 이별의 슬픔에 잠기는 것은 육신의 형제자매로 만난

끈끈한 정과 인연을 애도하는 것이지 죽음 자체를 슬퍼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바람은 침묵하고/ 새들은 조용하네./ 시적인 묘사가 참으로 적절하고 아름답다.

생명을 가진 자는 반드시 죽고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는 인생의 철칙을

이 보다 더 잘 표현 할 수 있는 적절한 시어가 있을 것인가? 


더 깊이 더 낮게

홀로 내려가야 하는

고독한 작별인사


흙빛의 차디찬 침묵 사이로

언뜻 스쳐가는

우리 모두의 죽음


한 평생 기도하며 살았기에

눈물도 성수처럼 맑을 수 있던

노 수녀의 마지막 미소가

우리 가슴 속에

하얀 구름으로 뜨네


-하관 중에서


하관 식에 참여한 시인은 허무하게 한 줌의 흙이 되어 돌아가는 노수녀의 삶의 종착을 보면서

슬픔의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시간적 차이는 있겠지만, 다 떠나야하는 운명을 보면서

땅 속에 묻히는 것은 노 수녀의 육신일 뿐, 영혼은 일어나 하늘의 부름을 받고 있는

그의 부활을 묘사하기를 / 노 수녀의 마지막 미소가/ 우리 가슴 속에/ 하얀 구름으로 뜨네/ 라고 하였으니 이해인 시에서는 절망과 슬픔, 그리고 비극은 찾아 볼 수가 없으며

한 인간의 생명을 흙으로 돌려주는 마지막 순간에서도 그는 부활의 긍정적 소망을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심어 주고 있는 시인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참으로 매력적이다.

평자도 때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왜 시인이 되었으며

무엇 때문에 시를 쓰고 있고, 또 어떤 작품을 남기고 죽으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글을 쓰는 시인이라면 수도복을 입은 특별한 신분, 존재가 아니라도 시인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그 임무 중에서 중요한 것은 메말라가는 인간의 감성을 촉촉이 적실 수 있는,

때로는 구체적 [concrete]이고 때로는 추상적[abstract] 인 작품을 적절히 배분해서

생동감이 있고 희망이 넘치는 시를 써서 인간이 해결 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와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현 시대에 있어서 시인들은 그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갈급한 심정으로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인간들의 호소를 외면한 채.

상업적 돈벌이에 급급해서 영혼의 울림이 없는 작품들을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며 예술이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지 못하고 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서정시를 고집하는 시인들이나 그 계보에 속한 비평가들은 다작을 하고 있는

이해인을 위시해서 여러 시인들의 산문에 치우친 작품들을 비평하고 있기도 하지만,

평자는 그들의 비평은 독선과 아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평이하게 읽혀지면서 삶의 힘과 용기를 주며 목마른 갈증을 해소 시켜주는

생수의 역할을 하는 시인들의 작품을 즐겨 읽고 있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 20세기는 이 시대에 걸 맞는 작품을 들고서 독자들을 향하여 걸어가야 한다. 그 이유는 각 시대마다 그 시기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느끼하지만 구수한 피자를 원하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구시대적인 전통 떡만을 먹으라고 계속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떡과 피자, 다양한 메뉴를 준비해서 적절하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시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 볼 때, 시인 이해인의 단상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의 작품세계는 어떤 절망적 환경에서도 소망의 불꽃 위에서 시의 빵을 굽고 있기 때문이고 이 빵 맛은 맛있기로 소문이 난 까닭인지 찾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4: 구령애에 불타는 운명적 천직관


시인 이해인의 창작 열기의 모태는 구령애에 불타는 신앙과 믿음에서 비롯되었고

수녀와 시인이란 직업 아닌 직업은 그의 운명적 천직임을 직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시인이란 존재는 감성을 잘 키우고 훈련한 후천적 힘에 의하여 기계에서 생산되는 상품처럼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힘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고 태어나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평자는 전자보다 후자의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영혼을 울리는 진리적 시를 쓰는 진정한 시인은 인간의 힘과 교육에 의하여 만들어지기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가슴 속 깊은 곳에 시인이란 아름다운 낙관을 찍어 구별된 존재론적 가치를

갖고 태어나 때가 되면 시대적 부름에 부응한다고 믿고 싶다.

고로,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천상천하에 단 하나뿐인 목숨을 가지고 태어나 오직

한 번 뿐인 인생을 살다가는 것이기에 주어진 사명을 자각하고 후회 없는 시인의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신인문학상 제도로 문단 데뷔의 길이 활짝 열려서 수많은 문인들이 한국문협, 회원으로 입회를 하고 있지만 문단의 질서만 어지럽히고 탁류의 강을 만들어 시인의 존재가치만 폭락 시키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하늘에도 

연못이 있네“

소리치다 

깨어난 아침


창문을 열고

다시 올려다 본 하늘

꿈에 본 하늘이

하도 반가워


나는 그만

그 하늘에 푹 빠지고 말았네


내 몸에 내 혼에

푸른 물이 깊이 들어

이제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전문


이 시가 던져 주고 있는 은밀한 암시는 무엇인가? 천국이다.

시인은 어젯밤 꿈길에서 천국을 거닐었다. 엄격하게 지켜지는 수녀의 기상 시간,

하루를 출발하는 기도를 마치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꿈에서 보았던 푸르고 맑고 빛나는

천국이 바로 그곳에 걸려 있었다. 천국의 가치를 일찍 깨달아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

수녀의 길을 걸어 왔기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몸에. 내 혼에/ 푸른 물이 깊이 들어/ 이제/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그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내용이 깊다. 몸과 혼에 푸른 물이 깊이 들어서 이제 다른 옷을 입을 수가 없다. 일평생 수도복을 입고 살아 온 삶이 이토록 행복하다는 것을 한 편의 시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녀만 행복한가? 그것은 아니다. 사도 신경으로 신앙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이 구원의 옷,

의의 옷을 걸친 행복한 존재임을 시인은 이 작품에서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옷을 입을 수가 없다”는 이 작품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물질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고,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아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가 입혀 주신 의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도 연못이 있네,” 그 연못에서

언젠가 나도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서 영원히 뛰어 놀 수 있다는 특별한 신분적, 존재적 위치를 깨닫는다면 소망적인 행복에 젖게 될 것이다.

수녀 이해인은 구령애에 불타는 타고난 시인이다. 그의 수녀 복을 벗기면 오래도록 입어

낡고 푸른 시인의 속옷이 돌출 될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과 명예는 단지 그 것 뿐인 것이다.

출간된 시집이 쇄를 거듭하면서 출판사에서 지불하는 인세 수입을 얻었겠지만,

그가 속한 수도회, 공동수입에 포함될 것이고 개인적인 재산은 계절 따라 바꿔 입는 낡은 수도복뿐이겠지만 그는 다른 옷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행복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다.

또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는 하늘이 주신 옹달샘이 있어 마르지 않는 샘물을 끊임없이 퍼내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나는 그만/ 그 하늘에 빠지고 말았네./

시인이 불타는 구령애나 혹은 사명감이 없이 그냥 작품을 쓴다고 한다면 매일 같이 드리는 기도문처럼 시를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인이 의미 깊은 시적 종자를 발견하고 그것을 형상화하여

예술로 승화 시키는 것은 모든 시인들의 바램이겠지만, 열정적 창작열은 구령애의 불꽃이

시심의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오를 때만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해인에게 있어서 탁월한 시적 능력은 무엇인가? 지극히 작은 종자라도 가슴속에 심어 상상의 지평을 확장, 독자들이 원하는 열매를 맺어 내어 놓는 다는 것이다.

고로, 이해인이 수녀 복을 입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수녀 복을 입고 난 후, 구령애에 불타서 시를 쓰는 천부적인 시재를 타고난 시인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신의 허락으로 이루어진 특별한 운명이 아닐까 싶고 그는 그것을 천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5: 결론


시인 이해인에게 있어서 문학과 종교적 신앙 행위는 동일한 선상에 놓아도 좋을 만큼

의미가 깊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일반 신자들은 기도를 드리면 엎드려 기도한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가 드리는 기도는

또 다른 한 편의 시가 되어서 그의 가슴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시집 속, 기도 시들은 하나님과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의 대화록을

공개한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남의 기도를 엿듣는 호기심과 감동이 어우러져

독자들은 이 기도 시를 읽으며 행복을 느끼고 있고 자신의 신앙생태를 점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단에서 다작을 하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은 질투의 시선과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묻는 실제 비평[Practical Criticism]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논의의 대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시인 이해인의 작품들은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거나 세속에 물들지 않는 신앙 시이며

종교적인 색체를 절제하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작에 대한 문인들의 이해가

묵시적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 시단에 출간 되어 있는 기도시로 묶어진 작품들이 이해인의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다양한 종교의 색깔을 지닌 시인들의 작품이 발표 되고 있지만,

질과 량에 있어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수녀라는 특별한 신분에서 우러나오는

진국기도의 진실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 세계는 믿음의 숲 속, 순수가 흐르는 진리의 옹달샘을 이루고 있다.

1945년생, 이제 창작으로 흐르는 옹달샘, 그 물의 량은 서서히 조절 될 수 있겠지만

그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깨어지고 금이 간 인생의 바가지를 들고 사람들은 그의 옹달샘을 찾을 것이고, 그의 문학은 종교를 초월해서 상당 기간 한국 시단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다. 

[다른 옷을 입을 수가 없네] 시집에 실려 있는 기도 시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았지만,

시인 이해인의 시 전체적인 주제[theme]이루고 있는 큰 줄기는 천국의 지향이었다.

일반 시인들의 작품이 서정과 삶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 관념에 머물고 있는 반면에

그의 반복되는 모티프[motif]는 그 산을 뛰어 넘어 황금보석으로 단장하고 수녀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처럼 감추어져 있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고 있고,

신자와 불신자를 문학적인 울타리 안으로 끌어 들여 구원의 길을 걷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고로, 시인 이해인의 작품들은 시의 내용이 명확하고 누구나, 기도하는 심정으로 읽으면 가슴에 와 닿아서 이해가 쉽고 감동이 되기 때문에 언어적 유희에 가까운 난해한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현대 비평가들의 구미에는 맞지 않겠지만 그는 이 시대, 하늘이 내린 천부적 시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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