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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론 - <민들레의 영토>를 중심으로
/ 김효중
 
한번 읽어보고 나서 문득 다시 대하고 싶어지는 시가 있다면 그 시야말로 좋은 시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시야말로 독자의 영상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시라고 한다면 이해인의 시는 바로 그러한 시에 속할 것이다. 그의 시는 결코 설득하려 든다거나 납득을 강요하지 않는다. 독자를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흔히 궤변이 되기 쉬운 법인데 그런 흔적도 없다. 왜 시를 쓰는지 그 동기, 출발점이 분명하다. 그의 시는 한마디로 소재와 체험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려 작품화하기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그는 언어와의 힘겨운 씨름을 하였으며 시의식이 얼마나 진지하고 투철한가 하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그의 첫시집 <민들레의 영토>의 서문에서 밝힌 박두진의 다음의 글은 이해인의 시가 왜 감동적일 수 있는지에 대하여 참고가 될 만하다.

 

클라우디아 이해인 수녀의 시작품을 처음 대했을 때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감정적 진실에 놀라고 감동했다. …·中略……그 종교적 테두리를 방패로 한 순수긍정적인 소명감적인 헌신의 노래, 그러한 기구이기보다는 인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깊은 갈등, 종교적 헌신으로 도달될 수 있는 영원한 법열과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정직한 고민, 고독감, 슬픔 같은 것이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 인생, 청춘에 대한 결연한 결단, 전부를 향기로 바치고자 하는 이의 지순한 헌신의 각오가, 이 모두를 조화한 신에의 제사로, 그러한 영혼의 불꽃으로 타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1975년 12월 첫 시집을 낸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녀원의 깊은 담 안에서 시를 쓰면서 修道하고 修道하면서 시를 쓰는, 말하자면 詩作과 修道라는 이중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꾸준히 작업해 온 셈이다. 그는 현재까지 <민들레의 영토>(1976, 29판), <내 혼에 불을 놓아>(1979, 24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28판) 등 세 권의 시집울 내어 놀라울 만큼 독자의 수를 확보하고 있다. 독자의 수가 많고 판이 거듭된다 해서 작품의 질이 무조건 좋다고 단언 할 수는 없으나 그의 시가 그만큼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순수한 호소력이 있음은 틀림이 없는 것이며 거기에 바로 시적 진실이 깃들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시가 갖는 범상치 않은 표현과 종교적 체험의 고백, 그의 시가 지닌 진실성에 주목하면서 그의 시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것이 본고의 의도이다.

 

편의상 그의 첫시집 <민들레의 영토>만을 가지고 논술해 보고자 한다.

 

이해인의 작품이 지니는 강한 전달성은 그의 정확한 視力에 연유한다고 보겠는데, 큰 욕심을 내지 않고 평범한 소재 속에서 그 소재의 뒷면을 들추어 시의 의미를 이끌어 낼 줄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巨視的이거나 조감적이기보다 근접적이고 미시적인 시각에 서 이해인은 때묻지 않고 빛 바래지 않은 포에지를 찾아내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實在를 은폐하고 있는 감각의 베일을 뚫고 리얼한 實在에 도달하려면 이러한 치밀한 작업은 필수적인 것이다.

 

기도는 나의 옴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聖스러운 깃발

太初부터 나의 領±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眞珠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人情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江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原色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민들레의 領土〉

 

이 시의 核이 되는 단어는 ‘사랑’과 ‘고독’, 그것은 곧 성직자의 길, 나아가서 우리 인생 그 자체에 연결되는 단어이다. 한송이의 작은 민들레꽃에서 인간의 고뇌와 생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총 8연으로 된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들레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토로된 '민들레의 연가'를 살펴 보아야만 한다. 민들레의 연가는 곧 시인 자신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은밀히 감겨 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날마다 봄하늘에 시를 쓰는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 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얇은 씨를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잘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해에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이 노래는 이해인 수녀 혼자 불러 보는 노래라고 시인 스스로 말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민들레는 이 시인에게 독특한 의미를 가진 대상으로 쓰여진 자연적 심상 이다. 이 시인이 밝혀 놓았듯이 전설을 가지고 있는 민들레는 시인이 성직자의 길을 택하여 확고한 신념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 큰 의미를 던져 준 꽃이기도 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 곳(광안리 수녀원)을 산책하던 어느 날 나는 극히 좁다란 돌틈을 비짐고 당당히 피어난 노란 민들레를 보고 “아. 어쩌면…”하고 솟구치는 기쁨에 몸을 떨면서 그의 정다운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넌 왜 고민하니 ? 나처럼 살면 되잖아. 네가 원하기만 하면 좁은 땅에 앉아서도 모든 이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 그는 내게 노래를 주었다.

 

여기서 민들레가 준 노래란 바로 위에 인용한 <민들레의 영토>의 1,2연을 말한다. 우리는 이 술회 내용 속에서 그의 시가 창작된 배경과 과정의 비밀을 캐낸 셈이다. ‘기도는 나의 음악’에서 시사하듯이 그의 노래는 시요, 시는 곧 기도인 것이며 ‘가슴 한 복판에 꽂아 놓은/사랑은 단 하나의/聖스런 깃발’에서 표현되어 있듯이 그가 민들레를 보고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사랑’ 그것이었다. 그 사랑은 ‘인간 모두를 사랑하되 하나를 갖지 않고 하나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초연히 모두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랑이다.

 

그의 첫시집 이름이 <민들레의 영토>가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시인들은 예사로이 보아 넘기기 일쑤인 민들레가 이해인 시인에게는 개인적 상징으로 쓰여 그의 시세계를 독특하게 한다. 3,4연을 쓰게된 배경은 또한 다음의 그의 술회를 통해 암시받는다.

 

진한 향기를 뿜지 못하는 앉은뱅이의 촌스런 열등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부모가 된 어릴 적 친구들이 홀연 눈부시게 나타나 야룻한 연민의 눈길로 나를 싸안을 때 나의 자존심은 더러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런대로 뿌리를 내렸다 싶던 나의 신념도 가끔은 불확실했고 꼭히 만나야 할 애인의 모습은 오리무중일 때가 허다했다.

 

‘애처로이 쳐다보는/人情의 고움도/나는 싫어’에서 솔직히 토로하고 있듯이, 기독교 문화가 뿌리를 내린 지 얼마 안 된.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에 비해 성직자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음을 시사한다. 5연에 이르면, 修道의 길을 걸어가면서 겪는 인간적 고뇌와 갈등, 그것을 극복하기에 많은 忍苦의 세월을 흘려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극복하고 초월자인 신에의 귀의를 통해 범상인으로는 맛볼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된 순간이 적나라하게 토로된 것이 6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아픔과 시련을 겪어야 했음을 나타낸 부분이 7연이다.

 

확고한 詩意識 속에서 인간적인 고뇌라는 씨줄과 신앙적 차원이라는 날줄이 서로 얽혀 엮어지고 있다는 데서 이해인 시인의 시는 오늘날 현대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인 난해성을 극복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시가 가진 빼어난 강점은 민들레와 같이 작고 하찮은 사물 속에서, 시인다운 감수성과 정서를 통해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원초적인 힘인 사랑을 발견하고 노래했다는 점이다. 이 사랑은 그의 시 전편에 흐르는 주제인 바, 이것은 우리 삶의 궁극적 가치이기도 한 것이다. 그외 시 속에는 운율의식도 강하게 드러나 있다.

 

잊혀진 言語들이
웃으며 살아오네

사색의 못가에도
노래처럼 비 내리네

해맑은 가슴으로
窓을 열면

무심히 흘려버린
日常의 얘기들이

저만치 내버렸던
이웃의 음성들이

문득 정다웁게
빗속으로 젖어오네

잊혀진 記憶들이
살아서 걸어오네

젖은 나무와 함께
고개 숙이면

내겐 처음으로
바다가 열리네

<비 내리는 날>

 

총 8연으로 된 이 시에서 대부분 연의 끝부분이 ‘~네’로 끝남으로써 반복적 효과를 내고 있고 자수율도 3ㆍ4조 혹은 4ㆍ4조가 지배적이다. 시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의 시의 주제가 대부분 사랑에 관심하고 있는 것처럼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표명되어 있다. 이 밖에도 〈맑은 종소리에〉, 〈가신 이에게〉 등에서 그의 운율 의식이 절묘하게 드러나 있다. 그의 시의 형식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기도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다.

 

피게 하소서
주여

당신이 주신 땅에
가시덤불 헤치며
피흘리는 당신을
닮게 하소서

태양과 바람
흙과 빗줄기에
고마움 새롭히며
피어나게 하소서

내 뾰족한 가시들이 남에게
큰 아픔 되지 않게 하시며

나를 위한 고뇌 속에
성숙하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주여
당신 한 분
믿고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당신만을 위해
마음 가다듬는
슬기를
깨우치게 하소서

진정
살아있는 동안은
피흘리게 하소서
죽어서 다시 피는
목숨이게 하소서

<장미의 기도>

 

조용히 눈을 감고 읊조리면 그대로 하나의 기도가 되는 시이다. 기도에서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삶과 슬기를 닮고 그대로 따르게 해 달라는 내용의 것으로 결곡한 求道者의 자세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길을 굳건히 걸어 가려는 결의인 것이며 이 첫시집의 편집후기에도 표명되어 있다.

 

한번 써 놓고는 잘 돌아보지 않았던 글들을 하나씩 손질해 가면서 나는 詩를 쓴다는 게 얼마만한 아픔과 인내를 수반하는 것인지 새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修道의 길 바로 나 자신이 되어 가는 길이라는 것을--누가 뭐래도 시는 나에게 있어 생생한 기도의 체험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거짓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머지 않아 내가 主의 제단 앞에 엎디어 終身誓願을 하는 날, 나는 영원한 사랑의 악속과 함께 시와 더불어 살겠다는 決意 또한 새롭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인 시인에게는 신앙과 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詩作을 위해서는 마음과 생활과 언어와 자기를 갈고 닦아야 하며, 갈고 닦는다는 것은 인간 수양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詩作을 위해서는 먼저 心身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心身이 갈고 닦이면 저절로 생활에는 수양미가 발휘되고 그것이 시작품 속에 나타나게 되어 일종의 향기가 풍기는 것이다. 東西古今의 많은 詩聖들의 작품 속에는 그들 人格의 향기가 곱게 풍기고 있지 않은가?

 

洪允淑이 이해인 수녀에게 “수도자로서 가장 큰 기쁨인 終身誓願과 또 하나의 기쁨인 첫 시집, 그 두 개의 길에서 이중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享有한” 영광된 출발을 축하했던 이유도 위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시에 드러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기도문의 형식을 취한 산문시가 있다는 점이다. 즉 첫 시집 제3부의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와 같은 시는 그러한 예에 든다. 여러 해 동안 쓴 것 1O편을 한 제목 안에 묶어 일련번호 1~1O까지 달아 놓은 것이다. 이 시편들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 고백하는 형식의 글이다. 이 속에서 시인의 돈독한 신앙, 구도자의 삶, 고난과 기쁨의 길을 동시에 걷고 있는 그의 생활 모습이 토로되어 있으며, 그와 같은 그의 삶을 그는 스스로 '행복한 아픔’(시편 3)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진솔한 마음의 결정체인 이 산문시편들은 자세히 보면 한용운과 맥이 닿아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물론 한용운과 이해인은 서로가 다른 종교적 차원에서 詩作을 이어 갔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에 공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일이다. 그의 시 전체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꽃밭에 물을 뿌리고 돌아오면/수백개의 촛불로'로 가슴이 타오르고 '내 생애가 한 번 뿐이듯/나의 사랑도 하나’뿐인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不治의 병 사랑’을 앓는 수도자의 고뇌와 기쁨이다.

 

이해인의 自然觀은 앞으로 더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본고의 논의 범위 내에서만 언급해 본다면 전통적인 자연관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달리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연에다 어떤 주관적인 해석을 가하고 주관에 의하여 변형시키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동양적이 아니고 서구적이요 기독교적이다. 즉 자연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을 유토피아나 이상향으로 정립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천당'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자연을 유토피아나 이상향으로 설정할 수 없음은 당연 한 일이다.

 

그러므로 피조물로서의 자연에 감정이입시켜 시인 자신이 자연과 등식관계를 이루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시인 자신은 민들레가 되어 시로 표출되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인에게나 가능한 일이지만 전통적으로는 자연 자체를 정령이나 초월적 존재로 믿고 의존해 왔던 것이 지배적이다.

 

이해인은 삶의 진실을 노래했다는 데서 한국 여류시인 가운데에서 회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시에 뛰어난 수사나 기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의식이나 제작 의식이 소홀하지가 않다. 뿐만 아니라 모국어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것을 현대시의 언어로 재창조하기 위해 무서운 집념을 지니고 정성을 기울여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언어와 정면 도전하고 있으며 아래의 글에서 이것이 증명된다.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하듯 나 역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글을 쓰고 싶었읍니다. 한가지 내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마디의 단어도 거짓말은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상상과 체험의 한계를 벗어난 어떤 어휘도 나는 쓸 수가 없읍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나의 내면에 와 직접 부딪치지 않는 것은 언어화시키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시가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그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찬미와 감사, 참회와 소망의 언어’인 것이다. 시는 끝없이 ‘그를 초대하는 기쁨의 축제’이며 ‘혼자서만 즐기기 아까와 이웃까지 불러 모으게 하는 풍요한 삶의 축제’요 '구원의 십자가’인 것이다. 이렇게 시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더불어 겸손한 자세로 꾸준히 인내하며 작업하는 그 에게서 우리는 앞으로 더 순수하고 절실한 시를 기대할 수 있다. 이해인의 시는 아직 연구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나 앞으로 본격으로 연구된다면 기독교와의 관계, 신앙과 고독의 문제, 사랑, 시어와 스타일, 자연관, 이미지의 분석 등에 관심을 두고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金 涍 中 (효성카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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