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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흰구름 편지 - 여름 단상
  작성일 : 2006-08-17
여름 단상
글 이해인 그림 김점선




아무리 더워도 / 덥다고 / 불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차라리 / 땀을 많이 흘리며 /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일하고 사랑하고 / 인내하고 용서하며 / 해 아래 피어나는 / 삶의 기쁨 속에 
여름을 더욱 사랑하며 /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여름을 시작하는 삶의 기쁨!
 
* 하늘은 흐리고 온통 회색빛인데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동안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붉디붉은 햇덩이를 보았다. 탄성과 환호 속에 일이 안 될 지경으로 황홀하였다. 말로는 다 표현 못할 그 모습. 세상을 끌어안고자 떠오르는 하느님의 얼굴, 사랑의 얼굴 죽음을 이기러 오는 생명의 얼굴. 아침마다 태양을 좀 더 눈여겨보아야겠다.
 
*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리네. 느티나무 소나무 무화과나무, 그리고 꽃밭에 서 있던 여름 꽃들도 오늘은 유난히 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네. 아주 시원해서 좋다고 하네. 우산을 쓰고도 피할 수 없는 비. 오랜만에 흠뻑 비에 젖는 일이 즐거웠다. 오랜만에 나를 만나러 온 상혁이와 살구나무 옆을 지나다가 비에 떨어진 살구 열매 몇 개를 주우며 말했지. “살구꽃이 피었다고 좋아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매가 달려 있는 게 신기하지?” 자신의 가치관과 너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일이 어렵다며 기도를 부탁하는 아름다운 청년을 위해 오늘은 특별히 살구 씨처럼 단단한 기도를 바쳐야겠다.
 
* 하늘은 푸르고, 햇볕은 투명하고, 바람은 시원하고, 새들은 재잘대고--그러니 나의 웃음도 당연히 밝고 맑아야지! 산 숲의 뻐꾹새 소리를 들으니 나도 덩달아 뻐꾹 뻐꾹 기쁨의 소리를 내고 싶네.
 
* 오늘은 우리 수녀님들과 경주를 지나다가 차에서 내려 오래오래 연꽃을 바라보았던 기쁨이 컸다. 오래전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았을 때와 같은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연못의 분위기….
수련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의 깊이를 더해주는 연꽃. 연꽃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했다고나 할까.
 
* 휴가철이 되니 광안리 바다에는 또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올 테지. 바다는 얼마나 고단할까. 그도 이제는 좀 쉬고 싶지 않을까? 다만 일 년이라도 안식년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 여름엔 바다가 읽어주는 시에 귀 기울여 보자.
 
* 날마다 바라보는 바다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항상 새롭다. 바다가 가까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오늘 하루도 내 안에 넓은 바다를 들여놓으며 모든 사물을 좀 더 넓게 바라보고 모든 사람을 좀 더
넓게 이해하고 사랑하리라 다짐한다.
 
* 내가 수십 년을 살아온 수녀원 집! 출장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고 설렜다.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어 행복한 사람. 나의 집은 무척 크고 훌륭하다.
여기서 나는 나날이 행복한 福女가 되어야지. 세평 반 정도의 내 조그만 침방은 언제 봐도 정겹다.
여기서 나는 더 열심히 '보물찾기'를 잘 하는 보물섬의 수녀가 되어야지. 살아 있는 동안은 쉴 수가 없네. 내적 즐거움을 잃지 않는 비결을 계속 배우고 연구해야 할 나의 과제….
 
 *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는 섭리에 맡기고 현재는 감사하라…. 오늘 아침 식당 독서에서 들은 말을 몇 번이고 되새기면서 하루를 감사로 시작한다.
 
* 오늘은 여름 메뉴로 자주 나오는 호박잎에 밥을 싸서 먹으며 늘 여유롭고 넉넉한 모습의 호박꽃과 호박 열매를 더불어 생각했지. 문득 권영상 시인의 ‘호박밭의 생쥐’라는 동시가 웃음 속에 떠올랐다.
 
 


   호박밭에
   호박이 큰다.
   자꾸 자꾸 자꾸……
   ― 정말
   비좁아 못 살겠네!
   생쥐가
   이부자릴 싸들고
   또 집을 옮긴다     
   _권영상의  ‘호박밭의 생쥐’

나도 이처럼 생생하고 재밌는 동시를 쓰고 싶은 마음도 함께 솟아올랐지.

 * 여름엔 우리 수녀원에도 손님이 많이 오신다. 우리 집에 다녀가는 손님들을 정성껏 대하고 돌보는 일도 중요한 소임이다. 수도원의 손님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잠시 머물기만 해도 평화를 느낀다고 한다.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만 들어도 좋다고 한다. 다양한 빛깔과 목소리를 지닌 손님들은 모두가 살아 있는 시이고 소설이고 수필이다. 손님이 귀한 ‘선물’이 되려면 내가 먼저 그에게 귀한 ‘선물’로 다가가는 선함과 친절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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