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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9월 - 가을바람 편지
  작성일 : 2005-03-31

 

 

                             가을바람 편지
                                             
                                   
  - 이해인 수녀 -

지난 여름은 참으로 더웠습니다.
선풍기 바람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만큼 숨쉬기조차 어려운
불볕더위를 체험하면서 어쩌다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들어오면
'아 아!'하고 눈을 감으며 기계가 아닌 자연 바람의 존재를 새삼 고마워하였습니다.
여름을 잘 견디며 가을을 더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겠구나,
가을바람은 또 얼마나 나를 설레게 할까 고요히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
꽃밭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코스모스 빛깔입니다.

 코스모스 코스모스를 노래의 후렴처럼 읊조리며 바람은 내게 와서 말합니다.

'나는 모든 꽃을 흔드는 바람이에요. 당신도 꽃처럼 아름답게 흔들려 보세요.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믿음과 사랑의 길에서
나는 흔들리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면서 살아온 것 같네요.

종종 흔들리기는 하되 쉽게 쓰러지지만 않으면 되는데 말이지요.

아름다운 것들에 깊이 감동할 줄 알고 일상의 작은 것들에도 깊이 감사할 줄 알고

아픈 사람, 슬픈 사람,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많이 울 줄도 알고-

그렇게 순하게 아름답게 흔들리면서 이 가을을 보내고 싶습니다.

                                           *

산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단풍나무 빛깔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을 골고루 다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져 있는 나에게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붉은 뺨을 지닌 바람이 내게 와서 말합니다.

'무어든 너무 잘하겠다고 욕심부리지 마세요. 사람들의 눈을 잘 들여다보면

그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답니다!'

그래서 이 가을엔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고 아껴두기로 합니다.

나를 의심하고 오해하고 힘들게 하는 한 사람에게 성을 내고 변명하기 보다

침묵 속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며 끝까지 우정과 신뢰의 눈길을 보낼 수 있을 때,

진정 용서하기 힘들었던 한 사람을 내가 환히 웃게 해 주고
그에게 화홰의 악수를 청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이란 단어를 자신 있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바다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수평선과 맞닿은 푸르고 투명한 하늘빛을 닮았습니다.

 

문득 어머니가 그립고 어릴 적 동무들을 보고 싶어하는 나에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다정한 목소리로 바람이 말을 건네옵니다.

'언제나 그렇게 그리움이 많으시니 이별도 갈수록 힘들겠군요!

그러면 슬픔도 많아질테니 걱정입니다.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바람의 존재를 자주 묵상해 보세요...'

충고는 고맙지만 그래도 이 가을엔 내가 슬퍼서 자꾸 울게 되더라도

더 많은 그리움을 키우려고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너무 많이 사랑해
언젠가는 마침내 올 지상에서의 이별이 힘들더라도 이 가을엔

사람과 삶에 대한 그리움을 멈추지 않는 용기를 지니려고 합니다.

                                          *
내 안에서 불어오는 가을 바람은 무어라 이름 지울 수 없는 빛깔입니다.

 

하얀 나비와 노란나비의 중간 쯤일 것 같은 빛, 어쩌면 슬픔을 닮은 눈부신 빛.

바람은 나에게 자꾸만 속삭이네요.'이제는 진정 서늘해져야지요. 가벼워져야지요.
다른 존재를 부수어버리는 죽음의 바람이아니라
키우고 익히는 생명의 바람이 되어 멀리 떠나야지요.'

-나는 이제 어디로 숨을 수도 없네. 내 마음대로 편하게 도망칠 수도 없네-

혼자서 생각하며 내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습니다.

이 가을을 한껏 겸허하고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내 안의 바람이 가만 있지 않을 것 같아 조심스럽고 슬그머니 겁이 납니다.

                                           *
이제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어떤 빛깔일까요?

 

담백한 물빛?  은은한 달빛?  아니면 향기롭게 익어가는 탱자빛?  터질듯한 석류빛?

무슨 빛깔이라도 좋으니 아름답게 가꾸시고 행복하시고 제게도 좀 보내주실래요?

우리 모두 바람 속에 좀 더 넓어지고 좀 더 깊어져서
이 가을이 끝날 때 쯤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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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2004년 9월의 해인글방은<좋은생각> 10월호에 보내려고 준비한 해인 수녀의 글을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마음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양해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거리가 생기면 '민들레의 영토' 까페를 통해서 하기로 할께요.

이 가을에도 내내 건강하시고 매일 매일의 삶의 길에서

평화를 깁는(peace weaver) 평화의 사람들이 되시길 비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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