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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편지 - 제 몫을 다하는 가을빛처럼
  작성일 : 2007-11-19

안녕하세요? 제가 좋아하는 11월입니다. 2007년 11월 소식은 (11월 5일자 부산일보 칼럼에도 나갈 예정인 )11월의 편지로 대신할게요. 사이 사이  저의 근황은  민들레의 영토 게시방을 통하여 올리기로 할께요. 감사합니다!

 

       11월의 편지  - 제 몫을 다하는 가을빛처럼     이해인(수녀.시인)

 

가을을 위하여/햇살 한 줄기 들길로 나왔다/큰 것이 아니라/작은 것을 위한 가을/그래서 풀꽃은 하얀 꽃대궁을 흔들고/고추잠자리는 더욱 빨갛게/온 몸을 물들이고 있다/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동안/가을 빛은 제 몫을 다 한다/늘 우리들 뒤켠에 서서도/욕심을 내지 않는 가을 햇살/오늘은 또 누구를 만나려는지/일찌감치 사과밭까지 와서/고 작은 사과를 만지작거린다/햇살은 가을을 위해 모두를 주면서도/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다닌다              노원호의 '가을을 위하여'

 

해마다 가을이 오면 제가 다시 읽어보는 동시입니다. 산에서 들에서 단풍 구경을 하며 가을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친지들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밝고 따뜻해집니다.
저도 며칠 전 몇 명의 수녀님들과 1박2일의 가을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순천만의 갈대밭, 함평의 국화전시회, 그리고 화순의 운주사를 돌아보며 '우리나라는 정말 아름답다!' '아아,이렇게 살아서 가을 산, 가을 들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 해!' 하는 감탄사가 끊이질 않았지요. 제의에 수를 놓거나, 객실에서 손님맞이를 하거나, 경리 일을 보거나, 자료실을 담당하거나, 환자를 돌보는 소임을 하는 수녀에 이르기까지 주로 본원에서 집안 일을 하는 수녀들의 설렘 가득한 감탄사를 듣는 일이 제겐 못내 새로웠습니다. 사계절 묵묵히 소임에 충실해 오는 그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야말로 '제 몫을 다하는 가을햇살', '뒤켠에 서서도 욕심을 내지 않는 가을햇살'로 여겨져 가슴이 찡해 왔습니다. 소풍을 다녀와서도 두고 두고 기쁨의 되새김을 하는 그들의 천진한 모습에서 동심이 깃든 하늘나라를 봅니다.

 

11월 초에 입는 검은 수도복을 상복으로 미리 입고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던 동생과 같이 포천의 천보묘원에도 다녀왔습니다. 마 C-351이라고 적혀진 조그만 무덤에는 고운 풀들이 덮혀 있었고 해 아래 눈부신 단풍숲이 모두 엄마의 얼굴로 보였지요. 같은 장소 납골당에 모셔진 숙모님과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도 연도를 바쳤습니다. 저를 세상에 낳아주시고 무한대의 희생적인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상실감은 이미 경험자들에게 듣긴 했어도 생각 보다 크고 깊어서 무척 자주 눈물을 흘린답니다.  세상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늘 자식들의 뒤켠에서 빛이 되어주셨던 어머니, 서른 아홉에 혼자 되시어 96세를 일기로 돌아가실 때 까지 57년의 세월을 오직 신앙 안에서 인내로이 사신 어머니, 자식들에게 무엇 하나 요구하는 일 없이 아주 작은 일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오신 어머니, 혼자만의 고독을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신 흔적이 역력한 어머니의 수첩을 꺼내 읽으니 그리움이 사무칩니다. '언제나 자비하신 하느님께 의탁하자. 참고 기다리자. 희망을 갖자' '내가 변변치 못해도 두 딸을 수녀로 만들었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애' '착하게 살아야 해, 올바른 길로 가야 해' '만났다 헤어졌다, 반가웠다 서운했다 이것이 인생이야' '연분홍 꽃수건 마음에 든다' '영적인 꿈을 선물로 받으니 감사하다' '이젠 마감하고 싶다. 갈 곳으로 가고 싶다...' 어머니의 글씨는 하얀 나비가 되고 빨간 단풍이 되어 날아옵니다. 특히 입회 후 40여년간 어머니가 절기마다 꽃잎을 넣어 적어 보내신 편지들은 어찌나 소박하고 아름다운 영성의 향기를 풍기는지 돌아가신 후에는 더욱 맑고 깊은 슬픔 속의 위로가 되어줍니다. 제가 예비수녀시절에는 '해라'체로 썼지만 첫서원을 하고 나서는 '습니다'체로 이어갔던 어머니의 편지 한 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닮은 강한 믿음 고운 마음씨의 복된 수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두 딸이 있는 수녀원을 다녀오면 삶의 용기가 더욱 강하게 느껴지곤 했는데... 막내 로사가 미국 가고 없으니 요즘은 수녀들 소식도 멀어지는 느낌으로 이모저모 아쉽고 기다려지기도 해요. 그러나 어린 것들을 생각하면 내 망녕 된 욕심은 움찔 해 지지요. 수녀는 이제 힘에 겨운 직책을 지게 되어 서울에도 잘 못 오는지? 그야말로 한 해가 야속할 정도로 빠르네요. 엄마도 나이 한 살 더 먹을 때 마다 조마 조마한 삶으로 기회 놓칠세라....기도하며 살아가지요. 작은 수녀 털바지 떠서 두었는데 다음번에 갖고 가든지 부치든지 좋을대로 합시다. 참 오늘 성당 회합에서 어떤 자매가 해인 수녀의 시를 읽었는데 다른 회원이 너무 좋다고 내게 부탁을 해요. 산처럼 무게있고 침묵과 겸덕을 표현한 내용인데 끝 부분 마다 하리, 하리라는 말이 나오던데 기억을 못해 미안하군요. 밤이 늦어 두루 안부 전하며 이만 끊으리다. 서울에서 엄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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